한글과 로마자가 병기된 19세기 한반도 전도 한글과 한국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2015년 9월 24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열린 특별전 '미래의 간략한 역사(Une brève histoire de l’avenir)'에 포함된 작품 가운데 작자 미상의 19세기 한반도 지도가 있었다.
이 특별전은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가 쓴 동명의 책(한국에는 《미래의 물결》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을 소재로 기획되었는데 그 가운데 '지식의 전달(la transmission des savoirs)'을 다룬 부분에서 지리에 대한 지식이 발전한 예로 근대까지도 유럽의 입장에서는 미지의 땅이었던 조선을 그린 지도를 소개한 것이다.

이 지도는 파리의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이 소장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종이에 먹으로 그린 19세기 지도라는 것과 Ge C 3317이라는 일련번호 외에는 별다른 서지 정보가 없다. 제목조차 쓰여있지 않아서 프랑스어로 Carte en coréen de la Corée, 즉 '조선어 조선 지도'라는 가제를 붙였다. 크기는 가로 60cm, 세로 97cm이다. 아마도 조선의 천주교 신자가 작성하여 프랑스인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에 전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작성한 〈조선전도(朝鮮全圖, Carte de la Corée)〉도 같은 경로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전해졌다.

이 지도는 현대 한국어 화자 입장에서, 특히 한국어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의 입장에서는 보면 볼수록 흥미롭다. 바로 한글과 로마자가 병기되었기 때문이다. 주요 성읍과 산, 하천, 섬 등의 이름을 한글로 적고 그 가운데 대다수는 로마자를 병기했다. 이에 반해 김대건의 〈조선전도〉는 일부 한자로 적은 지명을 제외하고는 로마자로만 표기되었다. 또 여러 성읍을 잇는 도로를 그리고 주요 성읍마다 서울까지의 거리를 한자와 아라비아 숫자로 적었다.

이 지도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운영하는 디지털 도서관 갈리카(Gallica) 누리집에서 마음껏 확대해서 볼 수 있다.

같은 누리집에서는 또 김대건의 〈조선전도〉를 베낀 지도도 찾아볼 수 있다. Carte de la Corée / d'après l'original envoyé par André Kim en 1846, 즉 '조선전도: 김 안드레아(김대건)가 1846년 보낸 원본을 따름'이라는 제목이며 여기서 확인해서 비교해볼 수 있다.

지도에 쓰인 로마자 표기 방식

'조선어 조선 지도'에서 조선 팔도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함경도 ham kieng to
평안 hpieng an to
황ᄒᆡ도 hoang hai to (황해도)
강원도 kang ouen to
경긔 kieng kei to (경기도)
츙쳥도 tchioung tchieng to (충청도)
경샹도 kieng siang to (경상도)
젼라도 tjien la to (전라도)
사실 로마자 표기에서 언제나 분명한 띄어쓰기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일부 경우는 아주 살짝 띄어 쓴 정도이지만 여기서는 읽기 쉽도록 음절 사이를 모두 띄어 쓰는 것으로 통일했다.

여기서 쓴 로마자 표기 방식은 프랑스어 발음을 기준으로 했다. 프랑스어에서는 ou가 [u] 또는 모음 앞에서는 [w]를 나타내며 e는 [e]와 [ɛ] 외에도 [ə]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니 'ㅜ'를 ou로, 'ㅓ'를 e로, 'ㅝ'를 oue로 나타내는 것이다('ㅔ'는 ei로 나타낸다). 또 프랑스어의 ch는 [ʃ], j는 [ʒ]로 마찰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파찰음인 'ㅊ'와 'ㅈ'를 나타내려 그 앞에 t를 붙여서 tch, tj로 쓴 것이다. 1866년 병인교난 때 조선에서 탈출했던 프랑스인 주교 펠릭스클레르 리델(Félix-Claire Ridel)이 편찬하여 1880년 출판한 한불 사전인 《한불ᄌᆞ뎐(韓佛字典, Dictionnaire coréen-français)》에서 쓴 로마자 표기 방식과 꽤 비슷한데 다른 점은 《한불ᄌᆞ뎐》에서는 'ㅑ', 'ㅕ' 등을 ya, ye와 같이 y를 써서 적었고 이 지도에서는 ia, ie와 같이 i를 써서 적었다는 것과 'ㅌ'을 《한불ᄌᆞ뎐》에서는 ht로, 이 지도에서는 th로 적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평안도를 적은 hpieng an to에서 p를 대문자처럼 기준선에서 위치를 올려 썼다는 것이다. 즉 원래 Pieng an to로 적었다가 앞에 h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한국어 지명을 로마자로 표기하면서 그 중간에 표기 방식을 수정한 흔적이 드러나서 흥미롭다. 프랑스어에서는 ph가 보통 [f]를 나타내기 때문에 'ㅍ'를 ph 대신 hp로 적었다. 또 충청도를 나타낸 tchioung tchieng to도 첫머리를 수정한 흔적이 있다.
서울은 특이하게도 한글로는 '경', 로마자로는 sieoul이라고 적었다. 여기서도 원래는 그냥 seoul로 적었다가 i를 집어넣어 sieoul이라고 고친 흔적이 보인다. 그러니 '서울'의 옛 형태인 '셔울'을 기준으로 고친 표기이다. 이 지도에서는 '경샹도', '젼라도', '츙쳥도'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ㅅ', 'ㅈ', 'ㅊ' 뒤에 [j]가 들어간 'ㅑ', 'ㅕ' 등을 쓰고 있지만 현대 한국어로 넘어오면서 이들은 'ㅏ', 'ㅓ'로 [j]가 탈락한다. 만약 seoul로 먼저 썼다가 한글 철자 '셔울'을 의식하여 sieoul로 고친 것이라면 철자는 옛 발음을 따라 '셔울'로 썼지만 실제로는 당시에 이미 [j]가 탈락한 [서울]로 발음되었다는 증거일 수가 있다.

Seoul이라는 로마자 표기는 이처럼 원래 'ㅓ'는 e로, 'ㅜ'는 ou로 적는 프랑스어 발음을 기준으로 한 방식에서 나왔다. 예전에 한국어 지명을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라 쓰던 시절에도 서울만은 Sŏul 대신 전통 표기인 Seoul로 흔히 적었었다. 그러다가 2000년에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발표되면서 '어'를 eo로, '우'를 u로 적게 했기 때문에 이를 따른 '서울'의 표기가 전통 표기인 Seoul과 일치하게 되었지만 원래는 Se-oul이었고 새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Seo-ul이니 그 철자를 쓰게 된 경위는 다르다.

이 지도에 나타나는 한글 표기와 로마자 표기를 같이 살펴보면 근대 한국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래아(ㆍ)

중세 한국어에서 기본 모음을 나타냈던 글자인 아래아(ㆍ)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다른 모음에 흡수되어 고유의 음가가 사라졌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도 글에서는 일부 쓰였다. 이 지도에서는 현대 국어에서 'ㅏ'에 대응되는 'ㆍ'가 일부 쓰이며 'ㅐ'에 대응되는 'ㆎ'는 꽤 흔하게 쓰인다.
그런데 로마자 표기에서는 그냥 'ㅏ', 'ㅐ'인 것처럼 a, ai로 적었다. 이는 한글 철자에서 'ㆍ', 'ㆎ'로 썼더라도 실제 발음은 'ㅏ', 'ㅐ'와 구별이 없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참고로 《한불ᄌᆞ뎐》에서는 'ㆍ', 'ㆎ'를 반달 모양 부호를 써서 ă, ăi로 적어 'ㅏ', 'ㅐ'와 구별한다.
츄ᄌᆞ tchiou tja (추자)
ᄌᆞ산 tja san (자산)
ᄉᆞ랍 sa rap (사랍?)
황ᄒᆡ도 hoang hai to (황해도)
ᄇᆡᆨ두산 paik tou san (백두산)
ᄃᆡ마도 tai ma to (대마도)
대동강 tai tong kang
그런데 이 지도에서는 'ㅢ'와 'ㅔ'를 둘 다 ei로 적는다. 'ㅡ'는 eu로 적으면서 'ㅢ'는 eui가 아닌 ei로 적은 것이 흥미롭다(참고로 《한불ᄌᆞ뎐》에서는 'ㅢ'를 eui로, 'ㅔ'를 ei로 써서 구별한다). 로마자 표기를 이렇게 정한 사람은 정말 'ㅢ'와 'ㅔ'를 같거나 비슷하게 발음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ㆍ', 'ㆎ'를 'ㅏ', 'ㅐ'와 동일하게 표기했다고 해서 꼭 같은 발음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ㅢ'는 당시 한자어에서 '의', '긔', '희' 정도로 한정되어 있고 '에', '게', '헤'는 한자어에서 거의 쓰이지 않으니 혼동의 여지가 별로 없어서 발음이 다르더라도 둘 다 ei로 적어도 무난하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의쥬 ei tjiou (의주)
긔쟝 kei tjiang (기장)
희쳔 hei tchien (희천)
졔쥬 tjiei tjiou (제주)
초계 tcho kiei

구개음화

근대 국어에서 'ㄷ', 'ㅌ' 직후에 모음 /i/ 또는 반모음 /j/가 오면 'ㅈ', 'ㅊ'로 구개음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방언에 따라 진행 속도가 달랐다. 이 지도에서는 구개음화가 일어나기 전의 음을 적은 표기가 보인다.
팔디 hpal-ti (팔지)
텬안 thieun an (천안)
그런데 흥미롭게도 한글 표기는 구개음화 이전의 형태를 쓰고 로마자 표기는 구개음화된 형태를 쓴 경우도 있다.
텬마산 tchien ma san (천마산)
'텬안 thieun an'에서는 'ㅕ'를 ie 대신 ieu로 쓴 것도 흥미로운데 이 지도에는 en이 예상되는 곳에 eun을 쓴 예가 꽤 있다.

두음 법칙

근대 국어에서 발생한 음운 변화로 이른바 두음 법칙이 있다. 표기상으로 어두의 'ㄹ'이 'ㄴ'으로 바뀌는 일은 16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18세기에는 /i/, /j/ 앞의 'ㄴ'이 탈락하는 현상이 시작되었는데 이 역시 방언마다 진행 속도가 달랐다. 이 지도에는 두음 법칙이 완전히 적용되지 않은 표기가 많이 나타나지만 흥미롭게도 한글 표기에는 두음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는데 로마자 표기에는 적용된다거나 그 반대인 경우가 몇몇 관찰된다.
년안 ien an (연안)
령덕 ieng tek (영덕)
영월 rieng ouel
특히 'ㄹ'이 'ㄴ'으로 바뀌는 두음 법칙으로 인해 한글 표기의 'ㄹ'이 로마자 표기의 n에 대응되는 경우가 많다.
림피 nim hpi (임피)
룡인 niong in (용인)
룡담 niong tam (용담)
한편 두음 법칙의 영향인지 '울릉도'의 '릉(陵)'을 어중에서도 '능'으로 적은 예도 보인다.
울능도 oul-neung-to (울릉도)
이 밖에도 이 지도를 통해 오늘날 '지리산'이라고 부르는 산을 당시에는 한자 智異山의 본음에 따라 '지이산'이라고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이란 속음이 쓰이게 된 배경에는 두음 법칙에 의한 '이'와 '리'의 혼동도 일조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갈리카 누리집에서 지도를 확대해서 보면 흥미로운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도에는 주로 기본적인 지리 정보만 나오지만 한산도 근처에는 '츙무공왜국파ᄒᆞᆫ곳(충무공 왜국 파한 곳)'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것을 보는 재미도 있다.

덧글

  • 채널 2nd™ 2017/10/09 11:57 # 답글

    >> 원래는 Se-oul이었고 새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Seo-ul이니 그 철자를 쓰게 된 경위는 다르다

    이런 '정보'를 이글루스의 이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행운이라면 행운.
  • 끝소리 2017/10/09 12:42 #

    감사합니다. 한국어 화자들이 전통 로마자 표기인 Seoul을 그 기원과는 다르게 Seo-ul로 분석했기 때문에 'ㅓ'를 eo로 적는 경우가 생겨서 새 로마자 표기법에도 그대로 반영된 듯합니다.
  • 남중생 2017/10/09 12:58 # 답글

    우산도, 대마도가 깨알같이 포함되어있는것도 흥미롭네요.
  • 끝소리 2017/10/09 14:26 #

    예, 조선시대 지도 대부분처럼 우산도와 대마도를 포함했습니다. 기존 조선 지도를 토대로 작성했을 테니까요.
  • 알카시르 2017/10/09 15:14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1.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당시 실제 발음은 서울,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라 하면서 표기만 셔울, 경긔도, 츙쳥도, 경샹도, 젼라도라 한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 발음도 그렇게 한 것일까요? 일례로 훈민정음에 나오는 솅종엉졩훈민정흠이나, 듕귁, ㅉ+아래아+ㅇ(字), 뼌한(便安)도, 실제 발음은 세종어제훈민정음, 중국, 자, 편안이지만 표기만 그렇게 한 것일까 궁금했거든요.

    2. 그렇다면 새 표기법을 정하는 와중에 Seoul의 eo가 ㅓ를 나타낸 것이라고 오해하여 eo=ㅓ로 하는 표기법이 제정되었던 것일까요? 이 때문에 에오에 해당하는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할 수가 없게 되어서 조금 불편하네요.

    3. 두음법칙상 룡인은 용인이 되어야 하는데 뇽인이라 했군요. 그때랑 지금 사이에 두음법칙의 규칙이 바뀐 것인가요? 그러니까 평안도 영변이나 함경도 회령, 정치인 권영세나 허경영의 경우에도 기존의 규칙에 따르면 녕변, 회녕, 권녕세, 허경녕이 되어야 할까요? 양녕대군이라 하지 양령이나 양영이라고는 안 하는 것처럼 말이죠. 같은 이치로 효령대군은 틀리고 효녕대군이 맞을 것 같기도 하네요.
  • 끝소리 2017/10/09 16:34 #

    1. '셔울', '젼라도', '츙쳥도' 같은 철자는 실제 그렇게 발음된 적이 있기 때문에 쓰기 시작한 것이지 괜히 그렇게 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ㅅ', 'ㅈ', 'ㅊ' 뒤의 /j/가 사라져서 오늘날의 '서울', '전라도', '충청도' 같은 형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셔울'을 seoul로 적었다가 sieoul로 고친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 당시 철자는 옛 발음에 따라서 '셔울'로 적었지만 실제 발음은 이미 [서울]로 바뀌지 않았을까 짐작한 것이고 처음부터 발음이 [서울]이었는데 '셔울'이라고 적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분명히 예전에는 [셔울]이라고 발음했다가 [서울]로 바뀐 것입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중세 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이 [중국]으로 발음했다면 '듀ᇰ귁'으로 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발음이 바뀐 것입니다.

    2. 'ㅓ'를 eo로 적게 된 것은 '서울'의 전통 로마자 Seoul을 잘못 분석한 영향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표기입니다. 원순 모음인 'ㅗ' o, 'ㅜ' u에 대응되는 비원순 모음을 앞에 e를 붙여서 'ㅓ' eo, 'ㅡ' eu로 적은 것이니까요. 또 '에오'에 해당하는 발음과 로마자 표기가 같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예전부터도 'ㅐ'를 ae로 적어서 '아에'에 해당하는 발음과 로마자 표기가 같았던 것과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3. 두음 법칙은 사실 두 가지 다른 현상을 묶어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첫째, 어두 'ㄹ'이 'ㄴ'으로 바뀌는 현상입니다. 둘째, 'ㄴ'이 /i/, /j/ 앞에서 탈락하는 현상입니다. 첫째 현상이 둘째 현상보다 먼저 진행되었기 때문에 '룡인'이 '뇽인'을 거쳐 '용인'이 된 것입니다.

    '회령', '효령대군' 등 지명과 인명에서 寧을 본음 '녕' 외에 속음 '령'으로도 발음하는 것은 첫째 현상 때문에 어두에서 '녕'과 '령'의 구별이 사라진 것에 따른 혼란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본음을 고집하기보다는 관습적인 속음을 쓴 것을 표준 형태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허경영'이라든지 '선동열', '이청용', '쌍용' 등 현대 이름에서는 본인이 선호하는대로 어중에서도 '두음' 법칙을 적용하는 예가 종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이름 중간에서는 두음 법칙을 적용하지 않지만 본인이 선호하는 형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대신 맞춤법에 맞게 쓴다고 '선동열'을 '선동렬'로 적는 것도 종종 봅니다.
  • 알카시르 2017/11/07 21:48 #

    1. 나무위키에서 보니, 훈민정음의 동국정운은 반절법을 기반으로 한 이상적인 정음을 묘사한 것이지 현실 한자음과는 거리가 멀었다더군요. 듕귁도 사실 당대에 이미 중국이라 발음했지만 반절법상 정음이 듕귁이라서 그렇게 쓴 것이라더군요. 그러니까 솅종엉졩훈민정흠도 실제 한자음은 오늘날과 별 차이 없었던 것 아닐까요? 춘향전도 춘향뎐이라고도 하는데, 저는 옛날 사람들은 실제로 뎐이라 발음한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사실 뎐이라 쓰고 전이라 읽은 것 아닐까요?

    2. 한국어를 한글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이 많더군요. 그런데 세종부터가 훈민정문이라 안 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말했으니, 사실 옛날부터 한국어는 말과 글을 구분하는 개념이 약했던 것 아닐까요?

    3. 삼국지에 나오는 낙양이 있는 주를 司隸라고 하던데요. 한국어 발음을 사예주라고도 하고 사례주라고도 하더군요. 두음법칙을 따르면 사례주가 맞겠지만 노례라 안 하고 노예라 하는 것을 보면 사예주가 맞을 것 같기도 한데요. 무엇이 맞을까요? 임진왜란 당시의 申砬도 신립이라고도 하고 신입이라고도 하는 등 한자음이 영 헛갈리는 경우가 많네요.
  • 끝소리 2017/11/07 23:57 #

    1. 《동국정운》은 표준 한자음을 기록한 운서를 따로 편찬한 것이니 '훈민정음의 동국정운'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반절법에 맞게 써서 현실 한자음과는 괴리가 상당했다는 것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국정운식 표기인 '듀ᇰ귁'의 당시 현실음이 '중국'이었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중세 국어에서는 '좋다'도 '둏다'라고 썼고 '저기'도 '뎌긔'라고 쓰는 등 구개음화가 진행되기 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전에 영화 제목을 《춘향뎐》이라고 지은 것은 실제 예전에 傳을 '뎐'으로 썼던 것을 흉내낸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전]이라고 발음되는 것을 [뎐]이라고 쓸 이유가 있겠습니까? 발음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 그렇게도 이해하기 힘드신가요?

    서북 방언에서는 ㄷ의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고 대신 [j]가 탈락하여 '좋다', '저기' 대신에 '돟다', '더기'라고 씁니다. 중세 국어의 '둏다', '뎌긔'라는 표기가 실제로 그렇게 발음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동국정운식 표기에서 '듀ᇰ귁'이라고 썼다면 일단 실제 당시 발음에서도 아직 [ㅈ]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혹시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데 솅조ᇰᅌᅥᆼ졩훈민져ᇰᅙᅳᆷ 같은 동국정운식 표기에서 'ㅇ' 받침은 꼭지가 달린 'ㆁ' 받침과 구별해야 합니다. 현대식으로 '솅종'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또 '흠'이 아니라 'ㆆ'를 쓴 'ᅙᅳᆷ'입니다. 동국정운식 표기에서 받침이 빌 경우 'ㅇ'으로 채우고 첫소리가 빌 경우 'ㆆ'으로 채웁니다. 나름 중국어 발음을 반영한다고 쓴 방법인데 당시의 언어 현실과는 괴리가 심했기 때문에 곧 폐기된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러운 중세국어식 표기로 바꾼다면 '셰종어졔훈민졍음'입니다. 치음 뒤의 반모음 [j]가 아직 있었습니다.

    참고로 《한불ᄌᆞ뎐》에는 中國이 '즁국'으로 나옵니다. 중세 국어보다는 오늘날의 '중국'에 가깝지만 여기서도 아직까지는 치음 뒤의 [j]가 유지된 형태입니다.

    2. 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소리글자라는 점을 강조한 이름일 수도 있고 일설에 의하면 표준 한자음을 정리하려는 목적을 나타낸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그 이름에 '글'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지 않다고 해서 말과 글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비약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3. 司隸는 '사례'로 적는 것이 원칙입니다. 단어의 첫머리가 아닌 경우 접두사처럼 쓰이는 한자가 붙어서 된 말이나 합성어가 아니면 본음대로 적습니다.

    하지만 奴隸를 '노례'가 아닌 '노예'로 적는 것은 관용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奴와 隸의 합성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두음법칙은 실제 발음 습관에 따라 예외를 많이 두기 때문에 실제 발음을 존중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아서 隸僕은 '례복'으로 쓰는 북한에서도 奴隸는 '노예'로 씁니다. 심지어 남한에서는 '조례', '천례', '하례'로 쓰는 皁隷, 賤隸, 下隸 도 각각 '조예', '천예', '하예'로 씁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가 아니고 중국의 역사 지명인 司隸의 경우는 '사예'로 쓰는 관습이 굳어있지 않는 한 '사례'로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니 표준 형태는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한글 맞춤법 제3장 제5절 두음 법칙 제11항 붙임 2에서 외자 이름의 경우는 관용을 고려해서 성에 붙여 쓸 경우에도 본음대로 적는 것을 같이 허용합니다. 즉 신립/신입, 하륜/하윤, '최린/최인' 등은 둘 다 맞습니다.
  • 책에봐라 2017/10/28 13:46 # 답글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 링크( https://m.facebook.com/groups/804937432895581?view=permalink&id=1522392671150050 )의 자료도 한불ᄌᆞ뎐(, Dictionnaire coréen-français)의 표기법과 같은 표기법을 채택하고 있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겸하여 제가 해당 링크에 중언부언 적어 놓은 내용들도 옳은 내용인지 함께 확인해 주시면 거듭 감사하겠습니다.
  • 책에봐라 2017/10/28 23:57 #

    생각해 보니 해당 게시물은 비공개 그룹에 올려 둔 게시물이네요. 이미 가입하셨을 수도 있으나 내용을 따로 복사해 두겠습니다.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이 쓴 《한국 역대 행정-관직 총람(Répertoire historique de l'administration coréenne)》을 참고하면 프랑스 극동학원식 표기법(Système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Orient)에 기반한 한글의 로마자 표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그 일람입니다.

    <자음>

    ㄱ k
    ㄴ n
    ㄷ t
    ㄹ r/l
    ㅁ m
    ㅂ p
    ㅅ s
    ㅇ -/ng
    ㅈ tj
    ㅊ tch
    ㅋ hk
    ㅌ ht
    ㅍ hp
    ㅎ h

    - 두 표기가 있는 경우 전자는 발음상의 초성일 때, 후자는 발음상의 종성일 때에 해당합니다.

    - 관직명이 주로 한자어라 그런지 'ㄲ, ㄸ, ㅃ, ㅆ, ㅉ'에 대한 표기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각각 'kk, tt, pp, ss, ttj'일 수 있겠으나, 'kk' 등은 '종성ㄱ+초성ㄱ' 등에서만 나타납니다(e.g. 尙食局 샹식국 Syang sik kouk).

    <모음>

    ㅏ a
    ㅐ ai
    ㅑ ya
    ㅒ yai
    ㅓ e
    ㅔ ei
    ㅕ ye
    ㅖ yei
    ㅗ o
    ㅘ oa
    ㅙ oai
    ㅚ oi
    ㅛ yo
    ㅜ ou
    ㅝ oue
    ㅞ ouei
    ㅟ oui
    ㅠ you
    ㅡ eu
    ㅢ eui
    ㅣ i
    ㆍ ă
    ㆎ ăi

    - 'ㅏ'는 'a,' 'ㅐ'는 'ai'로 적는 등, 딴이(ㅣ)를 그대로 'i'로 옮겼다는 점에서 발음보다는 자형에 근거한 예일(Yale) 표기법을 연상케 합니다.

    물론 불어에서 'ai'가 (단모음) [ㅐ]와 흡사한 [ɛ]로 발음됨을 의식한 표기로 볼 수도 있으나, 정작 불어에서는 [wa]로 발음되는 'oi'를 'ㅚ'에 대응시킨 것을 보면 불어 발음을 고려했다기보다는 역시 한글 자형을 의식한 듯합니다.

    한편으로는 당시까지도 한국어 하향 이중 모음에서의 후행 [j]로 인한 주음 전설모음화 및 [j] 탈락이 덜 일어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도 됩니다(이렇게 보면 'ㅐ'는 그냥 실제 발음이 [aj]여서 'ai'로 옮긴 게 되므로 자형이 아니라 실제 발음에 따랐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즉 /ㅐ/의 현실음은 [ɛ]가 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규범음(?)은 여전히 [aj]였기에 저렇게 옮긴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구한말 '아리랑' 가사를 옮긴 영어권 자료에서도 '홍두깨'를 'hongdokai'로 옮긴 사례가 발견됩니다.

    - 'ㅜ'에 대한 표기에서는 불어 발음을 고려한 듯합니다. 'u'가 불어에서 [y]가 됨을 의식하여 'ou'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eu'는 불어에서 [ø]로 발음됨에도 'ㅡ'에 대한 표기로 삼았다는 점에서, 역시 불어 발음을 그리 많이 고려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참고로 극동학원식 표기법에서는 중국어의 'ㄗ[tsɨ], ㄘ[tsʰɨ], ㄙ[sɨ]' 역시 'tseu, ts'eu, sseu'로 옮깁니다. 현대 한어병음으로는 'zi, ci, si'로 옮기지요.

    - 현행(및 옛 문교부) 로마자 표기법에서 'ㅓ'를 'eo'로 적는 것에는 이 표기법이 본의 아니게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즉 본래 'ㅓ'가 'e'이고, 'ㅜ'가 'ou'라 '서울'이 'Seoul'이 되는데(accent aigu 적용된 표기는 Séoul), 이것을 'Se-oul'이 아니라 'Seo-ul'로 분석한 결과 'ㅓ'의 표기가 'eo'가 되었습니다.

    물론 국어의 단모음 체계상 [ㅗ, ㅜ]를 평순모음으로 발음하면 [ㅓ, ㅡ]가 되므로, 해당 모음의 로마자 표기가 'o, u', 'eo, eu'임을 고려해 볼 때 앞에 붙여 주는 'e-'를 원순모음의 평순모음화 기호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이것은 위 실수(?)의 결과를 마침 잘 해석한 것에 가까워 보입니다.

    ※ 상술한 모음 표기를 봐도 그렇지만, 음운 변동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아도(e.g. 式年 식년 sik nyen; [싱년]에 근거하여 'sing nyen'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역시 전음법(transphonation)이 아닌 전자법(transliteration)에 기반한 표기법인 듯합니다. 모든 음절을 띄어 써 둔 것 역시 이와 유관할 터이고요.

    ※ 해당 문헌의 연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지만 모든 로마자 표기는 1933년 통일안에서 조정되기 전의 한자음 한글 표기를 기반으로 옮겨진 듯합니다.

    즉 ㄷ계 구개음화가 반영되어 있지 않고(e.g. 定宗 뎡종 Tyeng tjong), ㅅ계 역구개음화 역시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e.g. 太上王 태샹왕 Htai syang oang), 'ㆍ'와 '자음+ㅢ' 표기까지 남아 있습니다(e.g. 三國史記 삼국ᄉᆞ긔 Sam kouk să keui).

    ※ 이하 링크의 해당 문헌 원문을 직접 보면 아시겠지만 별의별 관직명이 다 있습니다. 개화기 외국인이 이것을 다 정리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터인데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해당 링크의 한글 표기는 현대 표기법으로 바뀌어 있으며, 위에서 소개한 원문의 프랑스식 로마자 표기에 앞서, 현대 한국 한자음에 기반하여 새로이 옮겨진 매큔-라이샤워(McCune- Reischauer) 표기가 먼저 나와 있습니다.

    http://dh.aks.ac.kr/MauriceCourant/repertoire/

    (이하 댓글)

    《한불ᄌᆞ뎐(韓佛字典, Dictionnaire coréen-français)》의 표기법도 위와 같은 듯합니다.

    한편 이와 비슷한 표기법이 적용된 조선 지도도 있다고 하네요. (이미 여기에 다른 분께서 소개해 주신 것 같습니다만) http://iceager.egloos.com/3175399 에 해당 정보가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 책에봐라 2017/10/28 14:15 #

    이글루스 댓글에서는 모바일로 입력했을 때 몇몇 특수문자와 한자가 보이지 않네요. 널리 이해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 끝소리 2017/10/28 23:30 #

    자료 소개 감사합니다. Répertoire historique de l'administration coréenne에서도 《한불ᄌᆞ뎐》과 동일한 로마자 표기법을 쓴 것 맞습니다. 역대 행정에 관한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보니 재미있네요.

    링크에서 한자 옆에 쓰인 한글 빼고 한국어로 된 부분 모두 직접 적으신 건가요? 대충 훑어보니 대부분 올바르게 번역되었습니다. 여러 주석을 남긴 P-E Roux가 원고를 정리하고 매큔·라이샤워식 표기와 한글을 같이 붙인 사람이겠죠? 약간의 오류가 보이네요.

    p. V 全韻玉篇 전운옥편 (2??)에서 원본을 확인해보니 (2 vol. in 4)라고 적혀있군요.
    p. VI 紀年兒覽 긴연아람 -> 기년아람
    p. VII 金慶門 김명문 -> 김경문

    nom littéraire는 '문어 명칭'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rang은 여기서 '열'보다는 '등급'이 알맞겠죠.

    Ce projet a été soutenu par l'Academy of Korean Studies에서 projet는 '계획'이라기보다는 '사업'이 알맞겠습니다.
  • 책에봐라 2017/10/28 23:52 #

    별 말씀을요. 오히려 양질의 언어학 자료를 접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끝소리님께 제가 감사하지요. 페이스북에 올려 주시는 글들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동일 로마자 표기법을 쓴 게 맞군요. 타자의 눈으로 본 우리네 모습은 언제 접해도 재미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만드는 듯합니다.

    옛한글 표기는 프랑스식 로마자 표기를 바탕으로 제가 직접 적은 게 맞습니다. 말씀하셨듯 새로 적힌 현대 한글 표기 및 매큔-라이샤워 표기에 일부 오류도 보이네요. 긴연아람[sic](기년아람<긔년ᄋᆞ람) 정도는 저 역시 쉽게 찾았었는데 전운옥편 원본까지 직접 찾으셨군요. 역시... 거기다 더 나은 불어 번역도 제시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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