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원산지인 에티오피아에서도 최상급으로 쳐주는 '커피의 귀부인'으로 알려진 모카 커피 품종 Yirgacheffe는 국내에 '예가체프'라고 알려져있고 최근에는 '이르가체페'라고도 부르기도 하는 듯하다. 하지만 원래의 발음을 따라 적으면 '이르가처페'로 적어야 한다.




이르가처페 원두(출처 Flickr: Jørgen Schyberg CC BY-NC-ND 2.0)
Yirgacheffe는 원래 에티오피아 중남부에 있는 마을의 이름으로 그 주변 지역에서 나는 커피 품종에 그 이름이 붙은 것이다. 커피 품종 이름으로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로마자 표기는 Yirgacheffe이지만 인터넷 지도 서비스를 검색하면 이 마을의 이름은 Yirga Chefe 또는 Yirga Cheffe, Yirgachefe, Yirga Ch’efē 등으로 나온다. 그런가 하면 영어판 위키백과에는 현재 Irgachefe가 표제어로 쓰인다. 한편 현지 표지판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Yirga Chaffe라고 썼다. 지금이야 덜하지만 지명의 로마자 표기가 중구난방인 것은 예전에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Yirga Chaffe라고 쓴 현지의 표지판(출처 Flickr: counterculturecoffee CC BY-NC-ND 2.0)
이 지명은 에티오피아의 공용어인 암하라어 이름이다. 원래의 에티오피아 문자로는 ይርጋ ጨፌ라고 쓴다(잘 보이도록 이 문단 밑에 더 큰 글씨로 썼다).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셈어파에 속하는 암하라어는 2007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에티오피아 인구의 29.3%가 제1언어로 사용하여 33.8%가 제1언어로 쓰는 오로모어에 밀린다. 하지만 암하라인들이 사실상 에티오피아를 지배해왔고 에티오피아 황제들은 대부분 암하라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암하라어만이 공용어 지위를 누린다. 또 오로모어는 에티오피아에서 하나의 언어로 치지만 사실 언어학적으로만 따지면 여러 언어로 나누어야 한다.
ይርጋ ጨፌ
에티오피아와 이웃 에리트레아의 셈어파 언어들인 암하라어, 티그리냐어(에리트레아의 공용어), 티그레어 등은 에티오피아 문자를 쓴다. 에티오피아 문자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게즈어'라고 부르는 고전 에티오피아어에서 쓴 문자이다. 로마자로 보통 Ge'ez라고 쓰지만 원래의 형태는 ግዕዝ Gəʿəz [ɡɨʕɨz]이니 이에 가깝게 '그으즈어'라고 하기도 한다. 역시 셈어파 언어인 고전 에티오피아어는 고대 악숨 왕국의 공용어였으며 오늘날 에티오피아 정교와 에리트레아 정교, 에티오피아 가톨릭 교회 등에서 예배 언어로만 쓰인다. 보통 고전 에티오피아어가 갈라져 오늘날의 여러 언어를 이룬 것이라고 보지만 자세한 가계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암하라어는 로마자 표기 방식이 통일되지 않아 골치를 썩인다. 여기서는 《에티오피아 백과사전(Encyclopaedia Aethiopica)》에서 쓰는 이른바 EAE 로마자 표기법을 따른다. 이에 따르면 ይርጋ ጨፌ는 Yərga Č̣äfe가 된다. 또 미국지명위원회·영국지명위원회(BGN/PCGN)의 BGN/PCGN 1967년 로마자 표기법을 따르면 ይርጋ ጨፌ는 Yirga Ch'efē가 된다.
한동안 암하라어의 한글 표기는 원칙 없이 통용되는 로마자 표기를 따랐는데 최근 심의된 에티오피아 이름들은 원 발음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암하라어의 표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 EAE 로마자 표기법에서 ə로 적는 [ɨ]와 ä로 적는 [ə]일 것이다. 로마자 표기에서 쓰이는 ə는 [ə]로 발음되지 않으니 혼동하지 말자.
중설 비원순 고모음 [ɨ]는 한국어의 '으'에 가까운 음으로 예전에는 한국어의 '으'를 [ɨ]라고 표기하는 적도 많았다. 요즘에는 '으'를후설 비원순 고모음 [ɯ]로 보통 쓴다. 또 에티오피아 문자에서는 뒤에 모음이 붙지 않는 자음도 ə [ɨ]가 붙은 것과 같은 글자로 쓰니 이 모음은 한글로 표기할 때 '으'로 적는 것이 좋겠다. 이에 따라 2013년 6월 20일 제109차 회의 때 심의된 인명 ጌታቸው እንግዳ Getaččäw Ǝngəda [ɡetatʧəw ɨnɡɨda] (통용 로마자 표기는 Getachew Engida)는 '게타처우 응그다'로 표기를 정했다.
여기서 ä [ə]는 '어'로 적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표기 방식은 2013년 7월 12일 실무소위에서 심의된 인명 ገብረኢየሱስ Gäbräʾiyäsus [ɡəbrəʔijəsus] (통용 로마자 표기는 Ghebreyesus) '거브러여수스'에도 적용되었다.
그런데 ይርጋ ጨፌ Yərga Č̣äfe에 나오는 yə [jɨ]는 어떻게 적어야 할까? 아무래도 '이'로 적는 것이 좋을 것이다. [ɨ]는 오늘날의 한국어 발음에서 '이'와 '으'의 중간음인데 '이'에 해당하는 반모음 [j]가 그 앞에 와서 합친 소리는 한 음절이므로 '이'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다. 로마자 표기 가운데 Irgachefe가 있는 것도 참고할 수 있다. 2015년 4월 29일 제120차 회의에서 인명 ሽፈራው ሽጉጤ Šəfärraw Šəguṭe [ʃɨfərraw ʃɨɡutʼe] (통용 로마자 표기는 Shiferaw Shigute)는 '*시퍼라우 시구테)로 표기를 정했는데 šə [ʃɨ]를 '시'로 적은 것도 참고할 수 있다.
그러니 최근의 암하라어 표기 용례를 따르면 ይርጋ ጨፌ Yərga Č̣äfe는 '이르가처페'로 적을 수 있다. 지명은 원 철자에서 띄어 쓰더라도 한글로는 보통 붙여 쓴다. 통용 로마자 표기인 Yirgacheffe도 한 단어로 붙여 썼으니 일부러 띄어 쓰자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암하라어 ይርጋ Yərga는 인명과 지명에 많이 등장한다. 인명으로 쓰이는 ይርጋ Yərga는 '잔잔하게 되라(may he/it be calm)'로 풀이된다. 또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는 에티오피아 남부의 지명으로 Yirga Alem '이르가알렘'이 등장한다. 암하라어 원 이름은 ይርጋ ዓለም Yərga ʿAläm [jɨrɡa ʔaləm]으로 원 발음에 가깝게 쓰면 '이르가알럼'이다. ይርጋለም Yərgaläm [jɨr.ɡa.ləm] '이르갈럼'으로 줄인 형태로도 쓰인다. 이 이름은 '세계가 잔잔하게 되라(may the world be calm)'로 풀이된다. ጨፌ Č̣äfe는 '늪(marsh)'이란 뜻이 있는 것으로 보이니 ይርጋ ጨፌ Yərga Č̣äfe는 '늪이 잔잔하게 되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이르가처페 지역 빌로야(Biloya) 농장에서 커피 원두를 말리는 모습(출처 Flickr: counterculturecoffee CC BY-NC-ND 2.0)
이와 같이 영어권에서 Yirgacheffe라고 부르는 에티오피아 지명이자 커피 품종은 암하라어 발음에 따라 한글로 적으면 '이르가처페'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예가체프'는 앞으로 '이르가체프'로 고쳐 써야 할까?
'예가체프'가 근거가 부족한 표기인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암하라어에서 직접 들여온 이름이 아니라 영어권에서 쓰는 로마자 표기를 거친 이름일 텐데 영어권에서도 Yirgacheffe의 원어식 발음을 제대로 알 리가 없으니 지금까지 암하라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지 못한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 하필 '예가체프'라는 형태로 알려진 것은 Yergachefe나 Yergacheffe 같은 표기를 옮긴 것이거나 Yirgacheffe의 첫 음을 '이'로만 옮기기는 뭔가 허전해서 y가 나타내는 반모음을 밝히기 위해 '예'로 옮긴 것일 수 있겠다. 또 일반 영어 단어에서처럼 어말의 e는 묵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로 썼다면 모를까 영어에서 r를 처리하는 방식을 생각하면 '예'는 Yir-나 Yer-의 영어 발음을 나타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외래어는 이미 한국어의 일부가 된 관용을 존중하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 규정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 또 지금은 잊혀졌지만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러니 표기 규정에 맞지 않는다고 꼭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어의 cashmere [ˈkæʃ.mɪə̯ɹ, kæʃ.ˈmɪə̯ɹ, (ˈ)kæʒ-]는 자음 앞의 [ʃ]는 '슈'로 적는다는 규정에 따라 '캐슈미어'로 적어야 하니 고급 모직물을 이르는 '캐시미어'는 cashmere의 틀린 표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캐시미어'는 사실 영어에서 쓰던 옛 형태인 cassimere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는 cassimere라는 형태가 거의 쓰이지 않고 cashmere '캐슈미어'와 kerseymere '커지미어'로 분화되어 쓰인다. 참고로 이는 영어에서 Kashmir라고 쓰는 지명 '카슈미르'와 어원이 같다.
하지만 '예가체프'는 이제라도 충분히 표기를 바꿀 수 있는 경우이다. '예가체프'가 얼마나 역사가 오래된 표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최근에 '이르가체페'로도 쓰는 예가 있는 것만 봐도 관용으로 굳어졌다고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카레'와 '커리'처럼 의미가 분화된 것이 아니라 단지 형태만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이르가체페'가 암하라어 발음에 훨씬 더 가까우니 만약 기존에 통용되던 표기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이게 나을 듯하다. 또 커피 품종은 '예가체프'로 표기하되 지명은 암하라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차피 현재 일반 언중이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형태로 이미 굳어진 것이 없다면 최근의 암하라어 표기 용례와 일관되도록 커피 품종과 지명을 '이르가처페'로 통일하는 것이 어떨까?
덧글
1. 에티오피아의 국어인 암하라어는 발음기호가 위키백과에는 [amarɨɲːa]로, 윅셔너리에는 [ämärɨɲːä]로 나오는데요. 둘 중 무엇이 맞고 한글로는 어떻게 표기해야 할까요?
2. 에티오피아의 고대 언어인 Ge'ez는 위키백과에는 [ɡɨʕɨz]로, 윅셔너리에는 (gəʿz)로 나오는데요. 둘 중 무엇이 맞고 한글로는 어떻게 표기해야 할까요?
2. [ɡɨʕɨz]는 발음 기호이고 'gəʿz'는 발음 기호가 아니라 원어 철자인 ግዕዝ를 로마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ግ는 'g(ə)', ዕ는 'ʿ(ə)', ዝ는 'z(ə)'를 나타내는데 사실 발음을 따지면 'gəʿəz'로 적는 것이 더 나아보입니다.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ɨ]는 로마자로 흔히 ə로 적고 [ə]는 따로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발음에 따라 적으면 '그으즈'이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게즈^어'가 표제어로 실려있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문자에서 모음이 따르지 않는 자음은 ə [ɨ]가 따르는 자음 글자로 나타냅니다. 즉 같은 글자가 yə [jɨ], šə [ʃɨ]를 나타낼 수도 있고 j [j], š [ʃ]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기존 표기 용례에서 ኃይለማሪያም Ḫaylämariyam (통용 로마자 Hailemariam)을 Ḫayəlämariyam으로 잘못 적고 '하이을러마리얌'으로 잘못 심의한 예가 있습니다. 여기서 ይ는 'yə'가 아니라 'y'를 나타내므로 '하일러마리얌'이라고 적는 것이 맞습니다. ይ를 '이'로 통일해서 적는다면 이런 실수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문제는 자음과 모음 사이에 놓인 반모음의 표기에 관한 문제입니다. 고대 노르드어는 외래어 표기법에서 다루지 않기 때문에 표준 방법은 없습니다. 대신 기타 언어의 표기 원칙을 적용하면 철자 j로 나타내는 /j/의 경우 앞의 자음과 뒤의 모음과도 합쳐 적으니 '뱌르니', '묠니르'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노르드어에서 나온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의 표기법에서 j /j/는 앞의 자음과만 합치고 뒤의 모음과는 갈라 적으니 이 방식을 따르면 '비아르니', '미올니르' 등이 됩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는 같은 북게르만어군에 속하면서 외래어 표기법에서 다루지 않는 아이슬란드어에는 전자의 방식을 적용하여 Bjarni '뱌르드니'와 같이 씁니다. 대신 Björgvin '비외르그빈'처럼 음가 수정 없이는 한 음절로 합칠 수 없는 경우는 갈라 적고 Guðjón '그뷔드욘' 같이 자음과 j 사이에 합성 경계가 있는 것은 이를 따릅니다.
현대 언어에서는 고대 노르드어의 일부 자음+j 조합이 한 음으로 합쳐졌습니다. 스웨덴어의 경우 sj, tj, kj 등이 한 음이 되었고 hj와 어두 dj, lj 등도 앞 자음이 묵음이 되어 /j/로 발음됩니다. 그래서 스웨덴어에서는 Hjalmar '얄마르', Kjartan '샤르탄', stjärna '셰르나' 등으로 쓴다는 것도 어쩌면 고려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정해진 표준 방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2. sjo나 Þjo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뒤의 모음과 합쳐서 쇼라 표기하면 [ʃo]와 헛갈리는데, 발음이 판이한데도 불구하고 모두 쇼로 표기하는 게 맞을까요?
3. 왜 노르드어라 부르는 것일까요? old norse에서 부르던 이름은 Norrœnt mál이니 이를 기준으로 하면 노뢴트어, 영어식으로 부르면 노스어 정도가 적당할 듯하네요. 설마 일본어 잔재는 아니겠지요...ㅎㄷㄷ
4. Norrœnt mál은 노뢴트 말이라 표기하면 될까요?
2. 어차피 외국어의 한글 표기로 외국어에 나타나는 발음 구별을 모두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j/를 어떻게 표기할까 결정하는데 고려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3. 고대 노르드어 norrœnn은 '북녁의'라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norrœnt mál은 '북녁의 언어'라는 뜻입니다. norrœnt는 mál이 중성명사이기 때문에 쓰이는 norrœnn의 중성형입니다. 형용사 norrœnn은 명사 norðr '북녁'과 같은 어근입니다. 고대 노르드어 norðr에서 온 스웨덴어·노르웨이어·덴마크어의 nord에 대응됩니다. 외국어에서는 형용사형을 언어 이름에 쓰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어 번역명에서는 원형, 주로 명사형 내지는 형용사의 어근을 쓰는 것을 선호합니다(예: 언어 이름은 français, italiano라고 하지만 나라 이름인 France, Italia를 기준으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 부름).
오늘날 북유럽 여러 언어에서 고대 노르드어는 norrœnn에서 나온 norrønt (노르웨이어·덴마크어), norröna (스웨덴어), norræna (아이슬란드어) 등으로 부르거나 nord에 형용사형 어미와 '옛'을 뜻하는 접두사를 붙인 fornnordiska (스웨덴어), gammalnordisk (노르웨이어), oldnordisk (덴마크어) 등으로 부릅니다.
북유럽 나라들과 언어를 이르는 영어의 Nordic, Norse는 nord에 대응되는 어근에 각각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식 어미를 붙인 형용사형에서 왔습니다. 이렇게 여러 언어에서 쓰는 명칭에 모두 nord라는 공통 어근이 포함되기 때문에 '노르드'로 옮긴 것입니다. 일본어에서도 ノルド '노루도'를 써서 古ノルド語라고 부르지만 '노르드'는 생각 없이 일본어를 따라한 것이 아닙니다.
4. norrœnt mál은 고대 노르드어 발음에 따라 적으면 '노뢴트 말'이 적합합니다.
그리고 버마어, 아일랜드어, 웨일즈어, 인도계 언어, 터키어, 일본어, 중국어에 대해서는 글을 쓰실 예정이 없으신가요? 그 언어들의 한글 표기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았거든요.
특히 모음은 혀의 위치에 따라 음가가 달라지기 때문에 딱딱 나누어떨어지지 않습니다. 국제음성기호에서는 혀의 높이에 따라 고모음, 근고모음, 중고모음, 중저모음, 근저모음, 저모음 등으로 나누고 앞뒤에 따라 전설모음, 근전설모음, 중설모음, 근후설모음, 후설모음 등으로 나누며 각 위치에 따라 기호를 부여하는데 이처럼 단계를 나누어 구분하는 것은 마치 무지개를 일곱 개 색깔로 나누는 것과 같아서 그 경계가 모호합니다.
실제 언어에 쓰이는 모음은 방언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 같은 화자가 발음할 때에도 혀의 위치를 측정하면 매번 똑같이 발음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특정 언어의 모음 음소를 발음 기호로 표현하는 것은 어느정도 작위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학자마다 같은 모음 음소를 다른 기호로 표현하기도 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모음 기호 [ɨ]도 중설 비원순 고모음에 사용하는 것인데 실제 실현되는 음가의 분포도를 그리면 대체로 이 기호가 나타내는 음을 포함시킨다고 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언어에서 쓰는 모음을 같은 기호로 적는다고 그 분포가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한글 표기를 언제나 똑같이 취급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기존 외래어 표기 규정을 보면 보통 /ɨ/라고 적는 음은 러시아어와 폴란드어의 경우 '이'로 적고 루마니아어와 베트남어에서는 '으'로 표기합니다. 여기에는 발음 외에도 철자나 친연 관계의 다른 언어와의 음소 대응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웨일스어의 경우 /ɨ/는 북부 방언에서만 [ɨ]로 발음되고 남부 방언에서는 [ɪ]로 발음됩니다. 더구나 영어에서 웨일스어 이름을 발음할 때에도 폐음절의 /ɨ/는 [ɪ]로 흉내내니 '이'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암하라어에는 /ɨ/를 '이'로 적어야 할만한 뚜렷한 이유가 없는 대신 에티오피아 문자의 특성상 모음이 없는 것과 /ɨ/가 따르는 것의 표기가 같기 때문에 '으'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른 언어에 대해서도 글을 쓰고 싶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이 없어서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