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리비아 사태가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리비아의 최고 지도자의 이름을 한글로 '카다피'로 쓸지, '가다피'로 쓸지 혼란스럽다는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로마자 표기의 혼란에는 감히 비할 수가 없다.


주요 영어 매체에서 쓰는 표기로는 Gaddafi (BBC, 로이터 통신, 알자지라), Gadhafi (AP 통신, CNN), Qaddafi (뉴욕 타임스, 이코노미스트), Qadhafi (미국 외무부), Kadafi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Gadafy (아이리시 타임스) 등이 있다. 이건 요즘 쓰는 표기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고 42년 가까이 독재를 했으니 그동안 쓰였던 표기는 더욱 다양하다.
여기에 Moammar Gadhafi, Muammar el-Qaddafi, Muammar Gaddafi 등 이름 전체의 표기를 따지면 경우의 수를 쉽게 헤아릴 수 없다. 2009년 미국 ABC 방송 블로그 글에는 표기가 무려 112개나 실려 있다.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로마자를 쓰는 다른 언어권에서 쓰는 표기까지 따지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아랍어로 쓰면 معمر القذافي이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다른 언어로 옮기려고 하면 이름의 표기가 통일되지 못하는 것일까?

카다피(사진 출처)
아랍어 표기의 어려움
1. 아랍 문자에서는 보통 단모음과 이중자음 유무를 표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보조 발음부호를 통해 표기할 수 있지만 평상시의 문자 생활에서는 이런 보조 발음부호를 거의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القذافي에서 단모음인 '카다피'의 첫 모음은 아예 생략되어 있다. 그러니 보통의 아랍 문자 표기와의 일대일 대응으로는 사용할만한 표기를 얻을 수 없다.
2. 아랍어는 자음이 많은데 다른 문자 체계로는 나타내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그러니 로마자에서는 보통 ḏ, ġ 등 특수 기호를 사용하거나 dh, gh 등의 조합을 활용하는데 완벽한 방식이 없다보니 여러 방식이 난립한다. '카다피'의 첫 자음인 '카프(ق)'는 현대 표준 아랍어 발음에서는 무성 구개수 파열음 [q]인데 한국어는 물론 우리에게 친숙한 대부분의 언어에서는 찾기 힘든 음이다.
3. 아랍어 발음 자체가 하나가 아니다. 현대 표준 아랍어는 아랍권의 통일된 의사소통을 위해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문어체 아랍어이다. 학교에서 외국어로서 아랍어를 배우는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문어체 아랍어를 배운다. 하지만 아랍어권에서 일상어로 쓰이는 구어체 아랍어는 문어체와 커다란 차이가 있으며 지역에 따라서도 큰 차이가 난다. 일상어만 따지면 아랍어권은 토속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루마니아어 등이 갈라져 나온 것처럼 이미 서로 다른 언어 여럿으로 갈라져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발음도 조금씩 다르다. 일상어에서 '카프(ق)'를 아직도 현대 표준 아랍어의 [q]로 발음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며 이 음은 지역, 계층, 심지어 성별에 따라 성문 파열음 [ʔ], 유성 연구개 파열음 [ɡ], 무성 연구개 파열음 [k], 심지어 유성 후치경 파찰음 [dʒ]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실현된다.
흔히 아랍어 이름의 한글 표기를 정하려는 이들은 현대 표준 아랍어 발음만 따진다. 하지만 현대 인명과 지명은 현대 표준 아랍어 발음만 무조건 따라서 표기하기가 곤란하다. 이런 이름은 구어체 발음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많으며 문어체에 가까운 아랍어를 쓸 때에도 이런 이름의 발음만은 구어체에 가깝게 하기도 한다.
다시 معمر القذافي로 돌아가자. 이 이름을 DIN 표준에 따라 로마자로 옮기면 Muʿammar al-Qaḏḏāfī이며 현대 표준 아랍어 발음은 [muˈʕammar alqaðˈðaːfiː] 정도로 나타낼 수 있다. 보조 발음부호 없이 실제 아랍 문자로 나타내는 음은 mʿmr ʾlqḏāfī 정도이다. 하지만 리비아 발음에서는 표준 아랍어 발음의 [q] 대신 [ɡ]나 [k], 심지어 무성 구개수 마찰음 [χ]가 쓰일 수 있으며 유성 치 마찰음 [ð] 대신 [d]가 보통 쓰인다. 모음의 발음도 표준 아랍어와 다르고 특히 단모음의 발음은 꽤 불안정하다. 그러니 보통 [muˈʕæmːɑrˤ əlɡædˈdæːfi]에 가깝게 발음되며 단모음 [u]는 [o]가 될 수도 있다(출처). 다양한 로마자 표기는 여기에서 연유한다.
표기 통일하기
언어 규범을 제정하는 단체가 있는 경우는 물론 표기 통일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스페인 한림원의 협조로 설립되어 스페인어 어문 정책을 담당하는 기관인 '푼데우(Fundéu)'는 Muamar el Gadafi를 스페인어에서 쓰는 표기로 통일했다(출처). 한국에서는 2003년 12월 17일 제55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카다피, 무아마르 알'을 표준 표기로 삼은 바 있다. DIN 표준 표기에서 특수문자를 일반 로마자로 치환한 Qaddafi, Muammar al을 '원어 표기'로 삼은 결과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외래어 심의회에서 표준 표기를 정했다고 저절로 표기가 통일되는 것은 아니다.
더 일반적으로 아랍어의 한글 표기 방식을 통일하려는 시도로는 국립국어원에서 준비한 아랍어 표기 시안이 있다. 철저히 현대 표준 아랍어 발음을 따른다. 하지만 이 표기 시안은 그동안의 아랍어 한글 표기 방식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결정적으로 그동안의 외래어 표기 원칙에 위배되는 부분이 많다.
아랍어 표기 시안에 따르면 Muʿammar al-Qaḏḏāfī는 '무암마르 깟다피'로 옮기게 된다. 고유 명사의 관사 al은 한글로 옮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표준 아랍어의 [q]는 'ㄲ'으로 옮기고 같은 자음이 겹칠 때는 첫 자음을 앞 음절의 받침으로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해서 '깟다피'라는 표기가 나왔다.
아랍어 표기 시안의 문제점: 무성 구개수 파열음 [q]의 표기
그럼 과연 '깟다피'가 '카다피'보다 나은 표기일까? 표준 아랍어의 [q]는 'ㄲ'으로 적는 문제부터 살펴보자. 외래어 표기법에서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즉 'ㄲ, ㄸ, ㅃ'를 쓰지 않는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언어에서는 파열음에서 2계열 대립을 쓰기 때문에 예사소리와 거센소리만으로 각 계열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국어에는 연구개 파열음이 'ㄱ, ㅋ, ㄲ' 세 개가 있지만 많은 언어에서는 유성음과 무성음 /ɡ, k/ 둘만 있기 때문에 각각 'ㄱ, ㅋ'으로 옮기는 것으로 통일했다.
예외적으로 태국어와 베트남어의 표기에서 된소리 파열음을 쓰는데 이는 이들 언어에서 한국어와 비슷한 파열음의 3계열 대립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국어의 /b, p, pʰ/는 각각 'ㅂ, ㅍ, ㅃ'으로 옮긴다. 태국어의 양순 파열음이 성문 상태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되기 때문에 한국어 양순 파열음의 3계열 대립을 활용하여 표기하는 것이다.
아랍어 표기 시안에서 쓰는 된소리 파열음은 무성 구개수 파열음 [q]를 나타내는 'ㄲ' 뿐이다. 무성 연구개 파열음 [k]는 'ㅋ'으로 나타내고 이집트 고유 명사에 한해 유성 연구개 파열음 [ɡ]로 발음되는 ج은 'ㄱ'으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파열음만 놓고 보면 'ㄲ'으로 나타내기로 한 음은 'ㅋ, ㄱ'으로 나타내기로 한 음과 조음 위치가 다른 음이니 성문 상태에 따른 음의 대립을 나타내기 위해 된소리를 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아랍어 표기 시안에서 각각 'ㅋ, ㄱ'으로 적는 마찰음 خ, غ을 구개수 마찰음 [χ, ʁ]로 본다면(이들을 연구개음으로 보기도 한다) 구개수음 세 개를 'ㄲ, ㅋ, ㄱ'으로 구분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마찰음 둘과 파열음 하나의 구분을 굳이 한국어 파열음의 3계열 대립으로 나타내야 할지도 의문이다.

Benghazi (사진 출처)
(여담이지만 리비아 동부의 주 및 그 주도 이름인 Benghazi [bənˈʁɑːzi]는 '벵가지'라고 흔히 쓰고 있는데,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서도 이탈리아어식 표기인 Bengasi를 기준으로 삼고 '벵가지'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gh로 쓰는 음은 유성 구개수 마찰음 [ʁ]이다. 그러지 않아도 격식을 갖춘 아랍어 발음에서 /n/의 위치 동화는 잘 일어나지 않는데 [ʁ] 앞에서는 /n/이 [ŋ]으로 발음될 일이 없다. 그러니 Benghazi를 실제 아랍어 발음에 따라 표기한다면 '벵가지'보다는 '벤가지'가 더 적합하다. )
무성 구개수 파열음 하나와 구개수 마찰음이 유무성 하나씩, 즉 [q, χ, ʁ]와 같이 구개수음 세 개가 공존하는 체계는 고전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베르베르어, 쿠르드어, 조지아어,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등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여러가지 이유로 이들 언어에서 무성 구개수 마찰음 [χ]는 'ㅎ'으로 옮기고 유성 구개수 마찰음 [ʁ]는 굳이 따진다면 'ㄱ'으로 옮기는 것이 관습적인 표기에 가깝다. 그렇다면 무성 구개수 파열음 [q]는 'ㅋ'으로 적는 것이 구개수음 표기에 균형을 잡는데 충분하며 굳이 'ㄲ'을 쓸 필요가 없다.
더구나 아프리카와 캅카스 지방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무성 구개수 파찰음 [qχ], 조지아 공화국 북서부에서 쓰이는 스반어(Svan)에서 쓰인다고 하는 [qʰ]는 거센소리로 들리므로 아랍어의 [q]가 된소리처럼 들린다고 하여 'ㄲ'으로 적는 것은 다른 언어 표기에도 일반적으로 적용하기가 곤란하다.
아랍어 표기 시안의 문제점: 겹친 자음의 표기
한국어에서 '깟다피'는 [까따피]로 발음된다. 아랍어의 겹친 자음 [ðð]을 나타내려고 쓴 표기가 실제로는 전혀 딴판인 'ㄸ', 즉 [t]로 발음되는 것이다. 유성 치 마찰음인 [ð]는 겹칠 때도 장음으로 발음되는 마찰음일 뿐이며 '까다피'라고 쓰면 마찰음은 아니지만 모음 사이에서 유성음인 'ㄷ' [d]로 발음되어 아랍어 발음에 더 가깝다. 즉 '깟다피'란 표기는 자음이 겹치는 것을 한글 표기로도 'ㅅㄷ'으로 불완전하게나마 나타낸다는 기호상의 이득 뿐 오히려 원 발음에서 더욱 멀어지도록 한다.
리비아식 발음 [ɡædˈdæːfi]를 기준으로 겹친 자음 [dd]를 나타내기 위해 '갓다피'라고 표기한다고 치자. 하지만 여기서도 [t(t)]로 발음되어 원 발음의 유성음을 살리지 못한다. 보통의 한국어 발음에서 모음 사이의 파열음 발음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아다 [ada], 앗다=아따=앗따 [ata], 아타=앗타 [atʰa]
일부러 천천히 끊어서 발음하지 않는 한 '앗다, 아따, 앗따'의 발음, '아타, 앗타'의 발음은 보통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니 외국어에서 쓰이는 겹친 파열음과 겹치지 않은 파열음의 대립을 나타내기는 어렵다. 유성 파열음을 겹쳐 적으려고 하면 무성음이 되며 무성 파열음을 겹쳐 적어도 실제 한국어 발음은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한 형태소 내에서 [mm, nn]을 제외한 겹친 자음은 겹치지 않은 것처럼 적는 것을 일관된 원칙으로 하고 있다(그래서 Muʿammar를 '무아마르' 대신 '무암마르'로 적는 것은 아랍어 표기 시안을 따를 만하다). 이탈리아어 Pinocchio [piˈnɔkkjo], Totti [ˈtɔtti], Ferrari [ferˈrari]는 각각 '피노키오, 토티, 페라리'로 적는다. 아랍어 표기 시안의 방식대로라면 '피녹키오, 톳티, 페르라리'가 된다. 아랍어에서는 자음이 겹치는지의 여부를 보통 쓰는 철자로는 알기 어렵지만 이탈리아어에서는 겹쳐 발음되는 자음은 철자에서도 겹쳐 적기 때문에 외래어 표기법에 반영하기가 더욱 쉬울 텐데 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표준 아랍어 발음의 Muʿammar al-Qaḏḏāfī는 '무암마르 카다피'로 적는 것이 외래어 표기 전통에 거슬리지 않는다. 리비아 아랍어 발음을 따르더라도 '무암마르 가다피', '모암마르 가다피' 정도가 어울린다. 아랍어 표기 시안을 따른 표기인 '무암마르 깟다피'는 용납하기 힘들다. 아랍어 표기 시안은 현재의 모습 그대로는 외래어 표기 체계에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많이 따른다.
덧글
하지만 로마자화되어 영어발음을 한 단계 거치고 들어온 '카다피'가 가장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제대로 된 표기법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Xerxes...영어로는 세르세라고 번역한곳을 봤는데...또는 크세릌세스???
끝소리님께서 이말의 발음이나 유래를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 Xenophon 이라는 이름도 함께 부탁합니다....
고대 페르시아에 대한 기록은 고대 히브리어 성경에도 있는데 고대 히브리어로는 크세르크세스를 ʼĂḥašwērôš '아하슈웨로시'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라틴어식으로 Ahasuerus가 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어 성경에서는 '아하수에로'라고 음역합니다. '크세르크세스'나 '아하슈웨로시'나 같은 페르시아어 이름에서 나온 것일 텐데 형태가 많이 다르죠? 참고로 영어에서는 Xerxes를 /ˈzɜːks iːz / '저크시스'로 발음합니다. '세르세'는 아마 이탈리아어식 이름인 Serse를 옮긴 것 같습니다.
Xenophon은 고대 그리스의 군인이자 역사가로 한국어로는 '크세노폰'이라고 표기합니다. 고대 그리스 인명은 보통 고대 그리스어식 이름을 따라 표기하는데, 고대 그리스어로는 Ξενοφῶν이라고 했고(발음은 /kʰsenopʰɔ́ː̀n/) Xenophon은 이것을 그대로 라틴어식으로 옮긴 것입니다. Xerxes와 Xenophon은 고대 그리스어 형태와 라틴어 형태가 일치하지만 그러지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다른 페르시아 왕명 '다리우스'는 라틴어 Darius를 따른 것이고 고대 그리스어식 이름은 Δαρεῖος '다레이오스'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어 Πλάτων을 따른 것이고 라틴어식 이름은 Plato '플라토'입니다. 여기에 영어, 프랑스어 등 현대 유럽어에서 쓰는 형태는 또 다른 것이 많으니 표기를 할 때 고대 그리스 인명은 고대 그리스어 형태를, 고대 페르시아 인명은 라틴어 형태를 쓰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제 귀에는 '함마르-알-컬-뎃' 으로밖에 들리지 않는군요 -_-;;
세계언어자료실
http://cafe.daum.net/worldspeak
히브리어의 ayin 을 한국어로 옮기는 기준은 없는듯 하지만...
히브리어 "이자크 페를만" 또는 영어 "이츠학 펄먼"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