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에 대한 여러 생각

지난번에 쓴 한글에 대한 낚시성 펌글 분석에 대한 반응이 예상 외로 뜨거워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블로그를 확인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많은 덧글이 달렸다. 답글을 대신해서 덧글에서 언급된 몇몇 주제에 관해 새로이 글을 쓴다. 그냥 평소의 개인적인 의견을 정리해놓은 것임을 밝힌다.

언어에는 우열이 없다

우선 답글 가운데 미소짓는독사님의 말씀대로 언어에 있어서 우열은 없다고 본다. 이 시각이 얼마나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언어의 우열을 가리려는 시도는 계속되었고, 아직도 어떤 언어는 뛰어나고 어떤 언어는 급이 낮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따져보면 결국에는 언어 외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 나의 굳은 믿음이다.

철학의 언어라 해서 고전 그리스어가 최고의 언어라고 본다거나 이슬람에서 신의 계시가 기록된 언어인 고전 아랍어를 최고의 언어로 보는 것은 고전 그리스어나 고전 아랍어 자체의 뛰어남과는 관계가 없다. 간혹 특정 언어의 어휘나 조어법이 특정 개념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런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언어 전체가 뛰어나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이다. 또 상대적으로 문명의 이기를 접하지 못한 이들의 언어에 대해서는 관련된 개념을 나타내지 못할 것으로 보고 열등한 언어로 치기도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산업혁명 이전의 영어도 현대 문명을 제대로 표현할만한 어휘가 없던 것은 마찬가지 아니인가?

문자의 우열은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아닌 문자를 논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천 개가 넘는 기호로 이루어져 있고 표의 요소와 표음 요소가 섞여 있어 배우는데 수 년이 걸렸을 것이라는 초기 수메르인들의 설형문자(쐐기문자)가 비효율적인 문자라는 데는 이의를 다는 이가 없을 것이다.

수메르인들이 쓴 설형문자 (그림 출처)

흔히들 문자의 종류를 논할 때 발전 단계를 따지고는 한다. 기호 하나가 의미 단위를 나타내는 표어 문자가 가장 원시적인 형태라면 이보다는 발전한 것이 기호 하나가 소리의 단위를 나타내는 표음 문자이고, 표음 문자 중에서도 일본어의 가나처럼 음절 단위를 나타내는 음절 문자보다는 아랍 문자와 같이 자음을 표시하는 자음 문자 또는 인도의 데와나가리 문자와 같이 자음 문자에 모음을 나타내는 표시를 추가한 '아부기다'라는 것이 더 발전된 단계이며 이게 더 발전한 것이 그리스 문자, 로마 문자처럼 자음과 모음을 모두 기호로 나타내는 음소 문자, 즉 '알파벳'이라고 흔히 보는 것이다. 여기에 한글과 같이 음소를 더욱 분석해서 자질까지 표현한 자질 문자의 단계에 이르면 문자 발전의 최고봉으로 친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분석을 통해 문자의 우열을 따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 언어를 표현하는데 필요한 기호 수를 최소화하는 문제와 소리의 단위에 대한 추상적인 분석에 있어서는 음절 문자보다는 음소 문자가 우수하다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처음 문자를 배우는 이들에게는 음절 문자가 더 이해하기 쉬울 수 있다. 어려서부터 음소 문자를 배운 우리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이라는 한 음절을 'ㅎ+ㅏ+ㄴ'과 같이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분석하는 것은 처음에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 표어 문자인 한자도 어떤 면에서는 표음 문자보다 뛰어날 수 있다. 사람은 글을 읽을 때 음소, 음절 단위로 읽는 것이 아니라 낱말, 나가서 여러 낱말로 이루어진 구절 단위로 읽는데 표어 문자인 한자는 기호 자체가 형태소를 나타내니 표음 문자보다는 읽기 쉬울 수가 있다. 물론 그런 몇가지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겠지만 생각처럼 딱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한 문자를 놓고 다른 문자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식의 주장은 하기 힘들다.

문자가 성공하려면 맞춤법이 중요하다

또 문자는 언어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언어를 문자로 어떻게 적을지에 관한 규칙인 맞춤법(철자법) 또한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도 훈민정음 당시의 철자를 그대로 쓴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말ᄊᆞㅁ"이라고 쓰고 [말씀], "듀ᇰ귁"이라고 쓰고 [중국]이라고 읽는 식으로 말이다. 아래 아(ᆞ)라는 모음은 중세 국어의 발음이 어떻게 분화되었는지에 따라 [아]나 [오], [으]로 읽어야 한다면 영어에서 ough라는 철자가 rough, though, through, tough, plough 등 단어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중세 영어에서는 철자를 통해 발음을 예측하기가 꽤 쉬웠지만 이후 영어의 발음 자체는 크나큰 변화를 겪었는데 철자는 크게 바뀌지 않으면서 오늘날 보이는 철자와 발음과의 괴리가 생겨났다. 그에 비해 한국어의 맞춤법은 백 년도 안 된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강남콩', '남비'로 쓰던 것을 '강낭콩', '냄비'로 바꾸는 등 발음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표준어를 개정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발음과 철자의 관계가 훨씬 더 규칙적이다.

그런가 하면 영어와 같은 로마 문자를 쓰는 핀란드어는 기호 하나가 음소 하나에 대응되는 매우 규칙적인 맞춤법 때문에 읽고 쓰기가 매우 쉽다. 이는 로마 문자로 기록된 역사가 짧은 다른 언어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문자 자체의 장단점을 논하기에 앞서 맞춤법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글이 아무리 우수한 문자라 해도 맞춤법이 영어 수준으로 불규칙적이었더라면 한글이 배우기 쉽다는 주장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언어학자를 위한 문자인가, 일반인을 위한 문자인가?

세종대왕의 뛰어난 음성학적 분석력을 반영하는 한글의 제자 원리는 언어학자들을 감탄하게 하지만 실제 한글의 사용에 있어서는 과연 얼마나 장점이 되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ㄴ', 'ㄷ', 'ㅌ' 등 조음 위치가 같은 소리를 비슷한 기호로 나타난다고 해서 배우고 읽고 쓰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도 연구가 필요하다. 오히려 비슷한 소리에 너무 비슷한 기호를 쓰면 분별력이 떨어져서 문제가 되지 않는지도 고려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한글의 이론적 토대가 아무리 뛰어나 언어학자들에게 인정을 받더라도 그것이 일반인이 쓰고 읽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게 과연 한글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한글이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제자 원리를 실용성과 적절히 조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세종대왕이 쓰기 쉽고 분별력이 높은 문자 모양을 고른 다음 자음이 조음 기관을 나타낸다거나 모음이 천지인을 나타낸다는 식의 설명은 나중에 그럴 듯하게 갖다붙인 것이라고 이해해도 사실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한글의 문자 모양이 비효율적이고 분별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의견이 나올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문자의 가독성은 정확히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지의 문제를 포함하여 우리가 글을 읽는 과정 전반에 대한 수많은 문제들이 아직도 자세히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모아쓰기의 장단점

한글의 큰 특징 하나는 각 자모를 음절 단위로 모아쓰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한글을 쉽게 읽는데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에는 자모 하나하나를 읽는 것이 아니고 묶음을 지어 읽는데, 모아쓰기는 이런 묶음이 눈에 쉽게 들어오게 해준다. 모아쓰기는 또 말의 기본형을 밝히는 형태주의 표기를 더 쉽게 해준다. '아니'와 '안이'는 풀어쓰기를 한다면 구분할 수 없겠지만 모아쓰기를 했기 때문에 '안이'는 '안'에 '이'라는 조사가 붙은 어절이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모아쓰기는 한글 쓰는 것을 조금 번거롭게 하고 특히 인쇄나 영상 매체를 위한 한글의 기계 구현을 어렵게 한다. 기호를 가로로 순서대로 나열하기만 하는 풀어쓰기 방식을 쓰는 로마 문자를 보면 글을 쓸 때의 움직임이 기준선을 중심으로 한정되어 있어 빠르게 쓸 수 있는 필기체가 발달하였다. 하지만 모아쓰기를 하는 한글은 글을 쓸 때의 움직임이 다소 복잡하여 로마 문자만큼 빨리 쓸 수 있는 필기체가 발달하지 못했다. 또 음절 첫소리 위치에 들어올 자음이 없다는 빈 자리를 표시하기 위해 'ㅇ'이란 기호를 사용하는 것도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비효율적이다.

또 모아쓰기를 하는 한글은 균형 잡힌 조형성을 통해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같은 자모라도 음절을 구성하는 다른 자모에 따라 그 모양을 조금씩 바꾸어 쓴다. '가', '고', '윽'에 들어가는 'ㄱ'의 모양은 모두 다르다. 그러니 한글을 활자나 컴퓨터 글꼴로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약 2천 자를 일일이 디자인해야 한다. 잘 안 쓰는 글자는 이렇게 디자인한 글자의 자모를 조합하여 만든다. 로마 문자 글꼴은 대문자, 소문자, 숫자, 일반 기호 외에 웬만한 특수 문자를 포함하고 굵은 글꼴, 이탤릭 글꼴, 굵은 이탤릭 글꼴에다가 작은 대문자(small caps) 글꼴까지 같이 디자인한다고 해도 일반 한글 글꼴 하나를 디자인하는데 필요한 자수에 미치지 않는다. 그러니 로마 문자 글꼴 개발은 빠르면 한두 달이면 끝나는데 비해 한글 글꼴 개발은 보통 일 년이 넘는 대작업이다.

윤디자인의 회상체. 조합형 탈네모 글꼴처럼 생겼지만 각 자모를 조합만 한 것이 아니라 조형성을 높이기 위해 조금씩 수정한 것이다. (그림 출처)

타자기 글꼴과 같은 탈네모꼴 글꼴을 쓰면 적은 수의 자모를 디자인하고 조합하여 글꼴 개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조합형 탈네모꼴 글꼴의 가독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시중에 나온 탈네모꼴 글꼴 대부분은 무늬만 조합형이고 자세히 보면 조형성을 높이기 위해 각 자를 일일이 손질한 것이다. 보통 탈네모꼴 글꼴이라 하는 한겨레 신문의 글꼴인 한결체도 사실 네모꼴과 탈네모꼴의 중간 형태이며 2천여 자를 일일이 디자인한 것이다. 주시경, 최현배 등 많은 국어학자들이 한글 풀어쓰기를 주장한 배경에는 아무래도 모아쓰기가 한글 기계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타자기 대신 컴퓨터가 등장한 오늘날에는 이 걸림돌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아쓰기 때문에 새로운 한글 글꼴 개발이 매우 더딘 것은 여전히 한글 시각 문화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모아쓰기의 장점이 단점을 훨씬 앞지른다고 생각한다. 특히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자판을 통해 글을 입력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손으로 글을 쓸 때의 번거로움보다는 글을 읽을 때 각 음절이 바로 눈에 들어오는 모아쓰기의 장점이 상대적으로 비중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글로 표현 못하는 발음

한국어의 발음은 계속 변화하여 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그에 따라 한국어의 음소를 적는 한글 자모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아래아(ㆍ), 반시옷(ㅿ) 등의 자모는 원래 표현하던 음을 쓰지 않게 되면서 사라진 예이다. 오늘날 쓰는 한글 자모는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해 대부분 정립되었으며 된소리를 'ㅺ', 'ㅼ'과 같은 ㅅ계 합용 병서 대신 'ㄲ', 'ㄸ'과 같은 각자 병서로 쓰게 된 것도 이 통일안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대 한국어에서 쓰이는 발음은 거의 모두 한글 자모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으나 끊임없이 새로운 발음이 생기기 때문에 현재 쓰이는 한글 자모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발음이 생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바뀌어', '쉬어' 등을 빨리 발음할 때 /위어/를 한 음절로 축약한다. 이 때의 발음은 [ɥʌ]이다. 그러나 이를 적을 마땅한 글자가 없어 '바껴', '셔'라고 흉내내기도 한다. '열중 쉬어'를 '열중셔'라고 하는 것이 그 예이다. 《한국어의 발음》의 저자 배주채는 옛 자모를 활용하여 [ɥʌ]를 'ㆊ'로 적을 것을 제안한다.

'바뀌었다'를 빨리 발음한 것을 옛 자모 'ㆊ'를 활용하여 적은 예. (나눔명조체를 손질한 것)

또 답글 가운데  '이으'를 한 음절로 발음한 것, 즉 [jɯ]에 관한 질문도 있었는데 Puzzlet C.님의 말씀대로 옛 자모 가운데 '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소리는 '유'로 흉내내기도 한다('으유', '븅신').

요즘은 외국어 교육의 영향 때문인지 외래어를 발음할 때 [f] 음을 쓰는 것을 꽤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소리 역시 옛 자모인 'ㆄ'을 빌어 표기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소리들이 현실 발음에서 널리 쓰이게 되어 독립된 음소로 인정된다면 이들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지금은 쓰지 않는 자모를 부활시키거나 새로 만들 필요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가 든 예들이 한국어에서 널리 쓰이는 독립된 음소의 위치에까지 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f]의 경우 많은 이들이 발음조차 못하고, 발음은 하는데 들을 때 'ㅍ'과 제대로 구별 못하는 이들도 많으며 외래어를 발음할 때 [f]를 쓰는 사람도 규칙적이고 일관적으로 이를 적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심지어 원 언어의 발음을 따르려면 [f] 발음을 할 이유가 없는 외래어에서 'ㅍ'을 [f]로 발음하는 것도 자주 듣게 된다. [ɥʌ]는 '위어'의 축약형으로 본다면 도입하는 것이 꽤 단순하겠지만 [ɥʌ]를 '여'와 제대로 구분하여 쓰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연구하여 만약 한국어 화자 대부분이 '위어'의 축약형으로 '여'를 사용한다는 것으로 판명되면 표준어 규정을 그에 맞도록 바꾸는 것이 새 자모를 도입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새 자모를 도입하려면 기존 글꼴에 새로 글자를 추가해야 하기 때문에 그 비용이 절대 만만치 않다. 당장 국립국어원에서 새 자모 'ㆊ'를 도입한다고 결정해도 컴퓨터 자판으로 어떻게 입력할 것이며 'ㄲㆊㅆ'을 모아쓴 글자를 나타낼 수 있는 글꼴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또 한글 자모 하나는 음소 하나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각 음소가 위치에 따라, 방언에 따라 어떻게 발음되는지는 한글 자모로 나타낼 수 없다. 같은 '어'도 서울의 표준어 화자와 부산 토박이, 평양의 젊은 층은 각기 조금씩 달리 발음하지만, 한글 자모로는 이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ㅈ, ㅊ, ㅉ'은 연구개음으로 발음되기도 하고 특히 평양 방언에서는 치경파찰음으로 발음되기도 하지만 이 구별을 한글 자모만으로는 나타내기 어렵다.

문법이란

답글 가운데 acarasata님은 문법 규칙에 얽매여 거기에 어긋나는 것은 잘못된 말이라고 재단하는 것을 비판하였고 이후에 문법이라는 개념은 개화기 이후 서양에서 도입된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 했는데 '문법'이란 말은 여러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헷갈리기 쉬우니 '문법'이란 말이 무슨 뜻으로 쓰이는지 해명해보려 한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규칙을 지니고 있다. 이를 '자연 문법'이라고 하자. 모든 언어는 저만의 자연 문법을 따른다. 흔히 표준어와 다른 방언을 쓰는 사람이 표준어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방언은 문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방언의 자연 문법이 표준어 문법과 다를 뿐이다.

파푸아뉴기니의 공용어 가운데 하나인  '톡피신(Tok Pisin)'은 언어가 서로 다른 집단들의 접촉을 통해 생겨난 혼합어로 어휘는 주로 영어에서 따왔다. 그러니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듣기에 톡피신은 얼핏 엉터리 영어를 문법에 맞지 않게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래서 몇몇 외국인들은 파푸아뉴기니인들과 대화하려면 톡피신을 배우라는 말을 듣고 엉터리 영어만 하면 되는데 배울 게 뭐가 있냐며 자신있게 파푸아뉴기니에 갔다. 그리고 현지인들 앞에서는 일부러 톡피신 화자들을 흉내내어 엉터리 영어를 하고는 그러면 뜻이 통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자 정작 현지인들은 알아듣기는 커녕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비웃었다는 일화가 있다. 톡피신은 '문법에 맞지 않는 영어'가 아니라 '영어 어휘를 많이 따왔지만 자체 문법을 가진 혼합어'이기 때문에 그 문법을 배우지 않고는 구사할 수가 없다.

규정 문법과 문법의 인공적 체계화

그런데 언어는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자연 문법도 조금씩 변한다. 방언마다 자연 문법이 다르다. 그래서 언어 생활의 통일을 위해 표준어의 자연 문법을 체계화한 규범을 가르친다. 이를 '규정 문법'이라고 하자.

고대 인도와 그리스의 문법학자들이 자연 문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학문으로서의 문법의 기원이다. 이들의 노력을 통해 자연 문법의 체계성이 밝혀졌을 뿐만이 아니라 이를 인공적으로 더욱 체계화하는 일도 일어났다. 고대 로마에서는 그리스의 문화를 숭상하여 고전 그리스어의 아티카 방언의 합리적인 문법 요소를 받아들여 매우 체계적인 고전 라틴어 문법을 완성하였다. 지금도 고전 라틴어를 배우는 이들은 문법의 합리성에 매력을 느끼는 이가 많다고 한다.

영어에서 to 부정사를 분리시키는 것이 문법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to boldly go와 같이 to와 동사 사이에 부사를 넣는 것은 틀리다는 것이다. 적어도 19세기부터 to 부정사 분리를 금지하자는 주장이 나왔는데 그 이유는 아마 고전 라틴어의 문법을 흉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어쨌든 고전 라틴어 문법처럼 다른 언어의 문법도 인공적으로 체계화, 합리화하려는 시도는 많았던 것 같다. 특히 프랑스어를 배우는 이들을 괴롭히는 여러 문법 규칙 상당수는 문법학자들이 고전 라틴어 문법을 흉내내어 도입한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한국어의 문법도 국어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분명 효율적인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통일된 문법이 필요하다. 규정 문법은 현실의 자연 문법을 최대한 반영하도록 정해져야 하고 반대로 언중은 질서 있는 언어 생활을 위해 규정 문법을 지키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정서적 반감 등의 이유로 규정 문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규정 문법을 현실의 자연 문법과 너무 달라지지 않도록 필요에 따라 바꾸는 유연성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규정 문법에 대한 언중의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고, 현실 언어에서 이미 규정 문법과는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면 언중의 합의를 통해 현실에 맞게 규정 문법을 점진적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실제 한국어의 어문 규범이 몇 년마다 수시로 조금씩 바뀌는 것은 규정 문법이 현실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어 교육에서의 문법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말한 문법은 대충 언어의 사용에 관련된 규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키백과의 정의를 따르면 넓은 의미에서의 문법은 음성학, 음운론, 의미론, 형태론, 구문론(통사론), 화용론 등 언어 규칙에 관련된 언어학의 여러 분야를 모두 포함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법을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것은 외국어 교육에 관련해서가 아닌가 한다. 이때 '문법'은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문장 성분, 문장 구조, 어순, 품사 등을 따지는 통사론과 형태론을 의미한다. 외국어 교육이 너무 문법 위주로 되어 있다는 말을 할 때는 이 좁은 의미를 쓰는 것이다. 문법 대신에 흔히 강조하는 회화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문법에 포함된다. 보통 '문법이 틀렸다'라고 할 때에도 이 좁은 의미의 문법, 정확히 말하면 통사론과 형태론 일부만을 말한다. 발음이 틀렸다고 해서 문법이 틀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문법 위주의 교육에 대한 비판은 규정 문법에 대한 비판과는 대상이 구별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문법 연구는 좁은 의미의 문법에 집중해왔기 때문에 규정 문법의 상당 부분은 통사론과 형태론을 다룬다. 또 외국어 교육에서 문법을 가르칠 때는 당연한 얘기이지만 문법에 맞도록 하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문법은 규정적인 성격을 가진다.

규정주의에 대해

한국어나 외국어를 배우면서 어떻게 쓰는 것이 맞고 어떻게 쓰는 것이 틀리다는 얘기만 많이 들은 기억이 있다면 다소 의외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언어학자들은 대부분 규정주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언어학자들은 언어 사용에 관련된 여러가지 규칙, 즉 문법을 기술하는 것이 목적이지 어떤 규칙이 맞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규정주의자들은 때로는 자의적인 규칙을 들이대어 언어 사용을 재단하려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연스러운 언어의 발전에 규정주의가 족쇄를 채우려 한다는 불만이 나올만도 하다.

그러나 어느 한도 내에서 규정주의는 필요하다. 언중이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여 그를 따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남들 다 A라고 말하는데 혼자 B라고 말한다면 의사 소통에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또 언어 사용 규칙이 조금씩 다른 이들이 모두 불편함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기 위해 표준어가 있는 것이고, 이 표준어를 가르치고 보급하려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맞고 틀린지 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언어 교육과 국가의 언어 정책은 규정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이 블로그에서 주로 다루는 외래어 표기법도 그렇게 해서 나온 언어 규범 가운데 포함된다.

이렇게 필요에 의해 언어 규범을 제정하고 관리하는 이들은 그것이 불변의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고 현실 언어에 맞도록 언어 규범을 끊임없이 보완해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고 '먹거리', '바래요' 등을 바른 표현으로 인정해야 할지와 같은 개별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의견을 모으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나는 외래어 표기법과 관련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고 논할 자신이 없어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인터넷 상에서라도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덧글

  • 뽀도르 2009/03/19 22:31 # 답글

    도움이 많이 되는 글입니다. 특히 '바뀌어'의 축약형에 대한 건 평소에도 괴리가 느껴지던 발음인데, 그 이유를 알겠군요.

    아래는 제가 한글로 영어 발음을 적는 걸 고안해본 건데

    Apples are on sale at the store.

    [æpəlz ɑr(ɝ) ɑn(ɔn) seɪl æt ðə(ðə)(ði) stɔr.]

    [애펄즈 아~ 안 세일 앳 `더 스토~ .]

    아직 테스트 용이긴 하지만 http://catch-english.appspot.com/ 가 제가 만든 한글로 적는 영어 회화 사이트입니다.

    새 글자로 쓰지 않고 글자 옆에 작은 기호를 덧붙이는 방법은 어떨런지...

  • 끝소리 2009/03/19 23:27 #

    한글을 응용하여 영어 발음을 적는 것은 시도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방법을 쓰기 때문에 혼란이 많아 널리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한글로 적힌 것을 보면 한국어에서 쓰는 발음대로 읽기 쉽고, 본 의도대로 영어 발음을 제대로 흉내내려면 한글 자모의 한국어 발음은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니 생각보다 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국제 음성 기호로 영어 발음을 나타내는 것도 배우는 것은 어렵지만 전세계적으로 통용된다는 장점이 있으니 당분간 한글을 응용하여 영어 발음을 나타내려는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 뽀도르 2009/03/19 22:32 # 답글

    늘 관심을 갖고 읽고 있습니다.

    다음은 제가 만든 한글 필기체 -_-;

    http://podor.egloos.com/190515
  • 끝소리 2009/03/19 23:31 #

    감사합니다. 좋은 시도인 것 같습니다. 근데 읽기가 힘들어요. ㅠ.ㅠ 요즘에는 손으로 글씨 쓰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로마 문자를 쓰는 나라에서도 예전처럼 발달한 필기체를 쓰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한글도 새로운 필기체가 설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 크리슈나 2009/03/19 22:50 # 답글

    늘 잘 읽고 있습니다.
    표기에 있어서 어느정도 편하다, 편하지 않다 정도의 개념은 있을 수 있겠지만 역시 한글날에 연례행사로 하는 것 처럼 어떤 감정이 잔뜩섞인 우월감은 필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온 국민이 세뇌되고 있어요...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 진 표기체계와 일부러 (과학적으로) 만든 한글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늘 생각해 왔거든요.

    그리고 역시 쉬어, 바뀌어의 줄임 표기가 이상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상하지만 달리 대안이 없는게 맞군요. ;;
  • 끝소리 2009/03/19 23:43 #

    세종대왕 덕택에 훌륭한 글자를 쓰는 것이지, 마치 우리가 잘나서 훌륭한 글자를 쓰는 것처럼 으쓱댈 필요는 없겠죠. 한글날이 문화유산이자 고도의 언어학적 지식이 축적된 업적으로서 한글이 지닌 가치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쉬어'와 '바뀌어'를 줄인 음은 현재로서는 마땅한 해결책을 찾기 어렵습니다. 제가 '바뀌었다'를 'ㆊ'를 활용하여 적은 것을 봐도 아시겠지만 이 자모를 쓰면 글자의 밀도가 너무 높아져 쓰고 읽기 불편한 점도 있습니다. 어쨌든 '위어'를 한 음절로 축약하여 발음하고 그것도 '여'와 구별하여 발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shortly 2009/03/20 08:18 # 답글

    훌륭한 글 즐겁게 읽었습니다. 저는 조금 더 풍부한 표현 및 발음의 한글을 위해 옛 자모들의 부분적인 살려냄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컴퓨터 폰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느느 이유로 예술분야 -시나 음악과 같은 분야에서-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ㅎㅎ
  • 끝소리 2009/03/20 09:07 #

    감사합니다. 옛 자모를 되살리는 것은 글꼴 문제 뿐만 아니라 입력과 인코딩 문제도 꽤 복잡하기 때문에 웬만큼 호응을 얻지 못하면 매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유니코드에서는 이론적으로 첫가끝 방식을 통한 인코딩이 가능하지만 실제 이를 지원하는 글꼴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현재 옛 자모를 지원하는 글꼴을 얼마 되지 않으며 사용자 정의 문자 영역을 활용하는 편법을 쓰고 있습니다.

    굳이 예술 분야까지 들지 않아도 옛 한글 문헌을 다루기 위해, 또 제주어 표기에서 쓰는 아래아계 모음(ㆍ, ‥)을 구현하기 위해 옛 자모를 제대로 지원하는 방법이 시급합니다.
  • 2009/03/20 09:3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끝소리 2009/03/20 10:11 #

    지적 감사드립니다. 링크 고쳤습니다.
  • Puzzlet C. 2009/03/20 13:46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바뀌어'의 준말에 대한 것이라면 2000년에 한글 학회의 학회지에 실린 글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ㅜㅕ'로 표기할 것을 제안하고 있어요.

    http://www.hangeul.or.kr/board/view.php?id=cm03&no=450
  • 끝소리 2009/03/20 17:04 #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문제를 다룬 글이 더 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는데 이렇게 훌륭한 글을 소개받아서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위어'의 준말을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로 발음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네요.

    생각해보니 배주채의 《한국어의 발음》에서도 이 소리를 'ㅜㅕ'로 적자는 의견에 대해 언급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사하면서 책을 두고 와서 지금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언어학 관련 서적은 거의 두고 왔다는... ㅠ.ㅠ
  • 迪倫 2009/03/20 13:47 # 답글

    오랜만의 글 잘 읽었습니다. 알파벳도 언어에 따라 이체자가 있고 그에 따른 특정 발음을 지정해서 사용하는데 (예를 들면 움라우트나 에스체트처럼) 한글도 그렇게 새로운 발음들을 원래의 제자원리에 맞춰 구성한다든지 아니면 옛자모를 좀 더 연구해서 사용해볼 수 도 있지않을까요? 끝소리님 의견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 끝소리 2009/03/20 18:14 #

    로마 문자는 원래 라틴어를 적던 것을 소리가 다른 언어를 적는데 쓰는 과정에서 새로운 글자(j, w, þ)나 발음 구별 기호(é, ç, ä), 합자(ß, æ, œ)를 추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각 언어마다 택한 방식이 달랐으니 꽤 무질서했습니다. 그에 비해 한글은 한국어 하나를 표기하는데 사용해왔고 처음부터 합리적인 제자 원리와 낱자의 조합 원리, 모아쓰기의 제약 등이 있어서 그렇게 상황이 혼란스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한글 창제 이후 지금까지 한국어에서 나타난 다양한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자음(ㅵ, ㅸ, ㆅ), 모음(ᅶ, ㆉ, ㆎ) 모두 여러 낱자의 조합이 사용되었습니다. 지금 새로운 소리를 적는데 현재 쓰는 자모로는 부족하다면 이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겠죠.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대로 자모를 추가하면 생기는 기술적인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과연 자모를 새로이 추가할 필요가 있는지, 추가한다면 어떤 형태를 고를 것인지(예를 들어 'ㆊ'와 'ㅜㅕ' 가운데 어느 것을 고를 것인지) 충분한 논의를 하고 언중의 합의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 迪倫 2009/03/21 01:16 #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한글 수출론의 입장이 아니라 반대로 다른 언어권과 접촉이 점점 많아지는 한국인/사회의 입장에서 기존 한글로 표기할 수 없거나 혼동이 되는 새로운 발음들을 접하게 되는 일이 많아지니 그런 측면에서 한국어에서 사용하는 한글 자체를 좀더 다양화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표준어의 개념 자체가 요즘은 도전을 많이 받는데, 그렇게 본다면 제주방언의 아래아나 경상방언에서 자주 나오는 순경음ㅂ 같은 경우 살려보는 것도 우리말의 다양성을 풍부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않을까 해서요.
    아, 그리고, 꼭 밝혀두고싶은데, 한글 수출론은 보통 문자의 수출이 대부분 정치적(때로는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 행사와 같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아 저는 다른 의미에서 부정적인 편입니다.
  • 2009/03/20 13:5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끝소리 2009/03/20 18:15 #

    지적 감사합니다. 링크 고쳤습니다.
  • 무다리 2009/03/20 18:24 # 삭제 답글

    로마 알파벳 계열에서는 새로운 음소/음운을 위한 새로운 글자를 추가하는데 드는 비용이나 어려움이 모아쓰기를 하는 한글과 비교하면 현저히 적습니다. 모아쓰기가 가독성이나 쓰기에 익숙하고 편리할 지는 모르나 확장성이나 유연성 면에서는 단점도 많은 셈이죠. 그리고 표현 가능한 음운 수가 많다고 꼭 좋은 문자라는 법도 없죠. 발음 기관을 상형했다고 좋은 문자라고 하면 모든 만물을 다 그림으로 상형한 상형문자들도 훌륭한 문자라고 주장하는 것과 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읽고 쓰기 편하고 언어의 종류나 시대에 따른 변화에도 적응성이 높은 문자, 추가로 미적으로 아름다운 문자가 좋은 문자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한글보다는 로마글자가 조금은 더 좋은 문자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 끝소리 2009/03/20 18:47 #

    모아쓰기의 장단점에 대해 잘 정리해주셨네요. 로마 문자 계열에서 새로운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쓰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새로운 기호 추가가 아니라 사실 있는 기호를 여러 개 사용하는 것이죠(ch, th, tsch 등). 풀어쓰기를 하는 문자는 이런 해결책이 매우 편리한데 한글은 기술적인 문제가 많이 발생하니 모아쓰기 때문에 확장성이나 유연성이 확실히 떨어집니다. 한글 수출론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은 하는 건지...

    좋은 문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죠. 저는 가독성에 높은 비중을 두는 편이라서 한글이 좋습니다. 미적으로 아름다운 문자라면.. 전 왠지 타밀 문자가 마음에 들어요.
  • 마우마우 2009/03/20 19:17 # 삭제 답글

    사실 한 때 저도 한글을 갖고 여러 언어들을 표기하기 위한 시도를
    개인적으로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반쯤 흥미로요)
    그런 경험으로 인해 얻어진 결론은 지금의 한글수출론이라든지 라는 것들은
    실질적으로 그런 제반 문제들을 모르는 사람들의 막연한 허상이라는 겁니다.

    확장성 얘기가 나왔는데, 확실히 확장성은 로마자가 좋습니다.
    그만큼 문자체계가 유연하죠.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다듬어
    졌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글을 다른 언어에 맞게 변형하려는 시도가
    개인의 문자나 언어적 취미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표음능력에서 한글보다 뒤쳐진다고 생각하는 일본의 가나-한자 혼용문 같은 경우는 일본 국내에 아이누라든가, 오키나와 같은 일본어가 아닌
    소수어 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언어들을 표기할 필요성이 대두되며, 따라서
    그에 맞는 변형 가나 표기법들이 존재합니다.
    미얀마에도 미얀마어 문자를 이용한, 타이에도 타이문자를 이용한, 소수민족
    언어들의 표기안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한국어 외에 그런 별도의 표기법을 적용해야할 인족 집단(ethnic group)이 없지요. 굳이 따지자면, 제주방언 정도가 별도의 표기법을 가질 수 있겠지만, 여기에 관심있는 사람은 없더군요.
  • 끝소리 2009/03/20 19:44 #

    한글로 여러 언어를 표기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폴리네시아 언어처럼 음운 체계가 단순한 언어는 그래도 현대 한국어에서 쓰는 자모만으로도 충분히 표기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같은 자모라도 한국어와는 읽는 방법이 많이 달라지겠죠. 하지만 그루지야어 수준으로 복잡한 자음군이 많다든지, 스웨덴어처럼 구별되는 모음이 많다든지, 일부 중국어 방언처럼 성조가 많다든지 하면 현대 한국어에서 쓰는 자모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영어만 하더라도 현대 한국어에서 쓰는 한글 자모로는 제대로 표기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흥미로라도 여러 언어의 한글 표기를 시도해본 사람들은 대부분 한글 수출론이 말씀하신대로 막연한 허상이란 것에 동의할 겁니다. 실제 문자가 없는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 로마 문자와 한글 가운데 선택하라고 하면 한글 표기를 현대 한국어에서 쓰는 자모만으로 한정한다고 해도 타자기나 컴퓨터 입력이 편하고 확장성이 뛰어난 로마 문자를 택할 텐데, 제대로 표기하려면 일반 한글 글꼴로는 구현하지 못하는 확장 자모까지 필요하다고 하면 그래도 한글을 쓰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도 이런 기술적인 문제는 아랑곳 없이 한글에 새로운 자모를 추가하면서 한글 수출을 연구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한국에 한국어와 다른 소수 언어가 없어 역사적으로 다른 언어를 위한 별도의 표기를 개발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은 좋은 지적입니다. 제주어도 한국어 방언 가운데 하나이니 음운 체계로 보면 표준 한국어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는 제주어 표기법은 아래아(ㆍ)와 쌍아래아(‥)를 쓴다는 것 외에는 표준 한국어와 같은 자모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imc84 2009/03/21 00:45 # 답글

    좋은 글 항상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학부생 때 개인별 과제를 "한글IPA 만들어오기"같은 걸로 내주는 수업이 있었는데, 한동안 한글 풀어쓰기로 노트 정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기말시험 때 한글 풀어쓰기의 실용화 방안에 대한 논술을 써 냈는데 논거 중 하나가 이런 얘기였죠.

    "로마자(대소문자)나 가나문자(히라가나/가타가나)같은 일부 문자들은 음가가 동일한 두벌체계가 있어 자국어를 쓸 때 외국어 음차, 고유명사, 강조 표기 등에 활용한다. 그러나 한국어는 현행 한글표기법상 외국어 음차, 고유명사, 강조 표기 등을 위해 반드시 별도의 문장부호를 써야만 하는 부담이 있다.
    한글 체계에는 동일쌍이 없는 대신 모아쓰기와 풀어쓰기라는 변별성이 큰 표기법이 있다. 모아쓰기가 일반적인 표기법이 된 까닭은 가독성이 우수해서도 있겠지만 본래 이는 사용자의 해독습관에 따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한글 필기법이나 전산기 글꼴 모두 모아쓰기에 최적화하였기 때문에 모아쓰기와 풀어쓰기의 문자해독력을 단순비교하고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앞서 문장부호를 곁들인 표기법을 대체할 한글 풀어쓰기법을 개발하는 것을 주장한다. 현행 한글 맞춤법, 전산기와 일상 한글 표현 등에 끼칠 변화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한글의 또다른 가능성을 살리는 방법이 될 것이다."

    기억에 의존해서 살려 쓴 것이라 문맥이 저런 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주장은 같습니다. 그 때 풀어쓰기로 노트를 정리하면서 부담이었던 것이, 의외로 "잘 쓰는 게" 훨씬 어렵다는 것이었는데요.

    해당 강의의 교수님조차도 보통 한글을 "풀어서 쓰기"보다 "풀어쓴 것을 읽기"가 어렵다고 인식했는데 저는 풀어쓴 것과 모아쓴 것의 낱자 꼴을 달리하고, 행간과 자간을 조절하는 등 (시험을 봐야 했으니까) '다시 읽게 됐을 때'를 신경써야만 했지요.

    개인 사례에 불가한 경험적 가설이지만, "모아쓰기 가독성이 풀어쓰기보다 전혀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존하는 모든 출판물이나 텍스트의 맞춤법, 정서법, 글씨 형태 등이 모아쓰기에 맞춰서 발달해 온 것 뿐이겠지요. 뒤집어 생각하면, 한글 풀어쓰기는 전체적인 언어생활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읽기 좋게 발달해 올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고요.
  • 끝소리 2009/03/23 07:57 #

    가독성에 관한 논의는 사실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독성에 아무래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익숙한 정도이기 때문에 가독성에 대한 의미있는 실험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가독성을 높일만한 변화도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면 읽기가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모아쓰기의 가독성이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제 주장입니다. 모아쓰기의 가독성이 더 뛰어나다는 주장은 들은 적이 간혹 있지만 자세한 근거는 듣지 못했고 제가 글에서 썼듯이 음절 간의 구분이 눈에 잘 들어온다는 수준의 설명만 보았습니다.

    제가 모아쓰기가 더 가독성이 좋다고 하게 된 것은 (로마 문자의) 가독성에 대한 수많은 글을 읽고 토론에도 참여해 보면서 형성된 의견이지만 아직까지 마음 속으로도 제대로 정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시도를 하자면.. 우리가 글을 읽을 때 단어를 인식하는 과정에 대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알파벳 자모)씩 읽는다는 serial letter recognition 이론은 퇴출된지 오래입니다. 현재 심리학자들은 한 단어의 글자는 하나하나 차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인식한다는 parallel letter recognition 이론을 대부분 인정합니다. 로마 문자를 기준으로 한번에 15 글자 정도를 인식하며 눈을 움직일 때는 그 반 정도인 7~9 글자 정도의 묶음을 단위로 읽는다는 것, 이 묶음 처리(chunking)에 자간과 어절 사이의 띄어쓰기가 중요하다는 것 등 로마 문자의 가독성에 대한 여러 실험 결과를 고려할 때 풀어쓰기보다 가로와 세로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음절에 대한 묶음 처리를 쉽게 해주는 모아쓰기가 가독성 면에서 더 나을 수 있다는 가설이 제게는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고 풀어쓰기와 모아쓰기의 가독성을 객관적으로 비교할만한 실험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막막하네요.
  • imc84 2009/03/23 23:47 #

    "음절에 대한 묶음 처리"가 모아쓰기의 이점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풀어쓰기가 일반적이었다면 지금 알파벳 자모를 일렬로 죽 늘여쓰는 것과 같이 한글 자모 역시 좌우로 늘어놓기 좋은 형상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요. 현재 전산기나 육필로 구현되는 한글의 모아쓰기 자형이 평면기하학적(?) 조형에 가까웠던 훈민정음 원형과 상당히 다른 모양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좀 김빠지는 얘기이지만, 관습적인 한글 자형을 갖고 비교한다면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더라도) 당연히 모아쓰기 가독성이 우수하겠지요.
    아무튼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사실 "인간의 익숙함"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가독성이나 그런 것들을 객관적으로 비교한다는 건 까다로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 끝소리 2009/03/25 13:27 #

    관습적인 한글 자형으로는 풀어쓰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한글을 정말 풀어쓰기에 적합하게 자형을 바꾼다면 꽤 바꿔야 할 테고, 한글을 안다고 해도 읽거나 쓰기는 커녕 한글이라고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실제 언중의 반발을 고려하여 그렇게 극단적으로 바꾸지는 않겠지만). 그럴 바에는 아예 로마 문자 등 다른 문자를 쓰거나 한글이 아닌 새로운 풀어쓰기용 문자를 만드는 것과 비교해서 얻는 장점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고유의 글자, 한글을 쓴다는 상징성은 남아 있겠지만... 이렇게 쓰다보니 저도 문득 한글 풀어쓰기 방식을 개발하고 연구해보고 싶네요...

    지금으로서는 가독성에 관한 객관적인 연구가 불가능해 보이지만 앞으로 지금껏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실험 방법을 개발해낼지도 모르죠. 전 사실 앞으로가 막연히 기대됩니다.
  • 무다리 2009/03/21 14:47 # 삭제 답글

    그런데 이 글의 처음에서 말한 대로 설형 문자는 누가 봐도 열등한 문자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당시 종이도 없던 시대 찰흙판에 간단한 꼬챙이 하나만으로 수메르어를 기록하고 읽는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문자였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자 중에 하나이지만 그 당시 언어의 음절과 숫자를 표현하는데는 충분했습니다.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효율적인지 좀 알려 주세요. 제가 살형문자를 찰흙판에 찍는 과정을 본 적이 있지만 의외로 빨리 기록이 가능하더군요. 물론 상형성을 가지고 무지막하게 복잡하게 구성하는 문자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비효율적이고 하기엔 좀 지나치네요.
  • 끝소리 2009/03/23 07:58 #

    오해하셨군요. 제가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지만 '설형 문자' 자체가 열등하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설형 문자라는 문자가 하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점토판이라는 매체를 쓰지 않게 되면서 사라질 때까지 수 천 년이나 애용되었던 문자 형태를 이르는 것입니다.

    저는 '설형 문자' 전체가 아니라 '수메르인들이 최초로 사용한 설형 문자인 수메르 문자'가 비효율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문자가 설형 문자라는 것은 문자의 효율과 상관이 없습니다. 특히 저는 문자의 기록 속도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없고 설형 문자를 기록하는 것이 느리다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수메르 문자가 비효율적이라고 한 이유는 거의 천 개에 다하는 기호를 통해 적는 음절 문자여서 일부만이 배울 수 있었고 그것도 배우는데 수 년이 걸렸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아무리 수메르어의 음절을 표현하는데 충분했다 해도 그만큼 배우기가 어려우면 비교적 문제가 있는 문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게 사실상 인류 최초의 문자였기 때문에 후대의 문자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고 그 때문에 제가 예로 든 것입니다.

    수메르 문자 이후 아카드어, 히타이트어 등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된 설형 문자는 기호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대신 옛 수메르 문자 기호를 경우에 따라 표음 기호로 쓰기도 하고 표의 기호로 쓰기도 하는 이두 비슷한 체계가 되었습니다. 후대의 고대 페르시아 문자나 우가리트 문자는 같은 설형 문자이지만 각각 20여 개 기호를 사용하는 효율적인 문자였습니다. 특히 고대 페르시아 문자는 사실상의 자모 문자(알파벳)이었습니다. 그러니 한 문자의 형태가 설형 문자라는 것은 그 문자의 우열을 논하는데 상관이 없습니다.
  • 십자가전달자 2016/10/01 16:03 # 삭제 답글

    이현복교수님과 김차균교수님의 평가를 받은 이병수의 한글모음 " 이으" 에 관한 연구
    아래 주소를 찾아가보세요
    http://blog.daum.net/lbs21lbs/3907260
    http://blog.daum.net/lbs21lbs/3907187
  • 끝소리 2016/10/04 21:40 #

    'ᆖ'는 유니코드에 U+1196로 이미 등록된 기호이니 글꼴 지원만 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쓸 수 있습니다. 제주어 표기에서 'ㆍ' /ɒ/에 /j/가 붙은 /jɒ/를 'ᆢ' U+11A2로 쓴다는 것을 생각하면 본문에서 언급한 'ᆜ' U+119C보다 오히려 나을 수 있습니다. 단 김차균 교수님의 지적대로 [jw]는 틀렸고 'ㅡ'를 어떻게 적느냐에 따라 [jɯ] 또는 [jɨ]로 적어야 합니다(저는 전자 사용). [jw]는 반모음끼리의 조합으로 그 자체로는 음절핵이 될 수 없고 이탈리아어의 aiuole [aˈjwɔle] 같은 경우에 다른 모음 앞에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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