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어가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일종이라니? 외래어 표기 실무

외래어 표기법 가운데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이 있다. 세르보크로아트어(영어로 Serbo-Croatian)라는 표현은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언어를 부르는 말이다.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이후 지금은 정치적 이해에 따라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는 다른 언어로 보고 있고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일부였던 보스니아어, 또 세르보크로아트어와는 다른 남슬라브어군 언어인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등도 독자적인 언어로 인정되고 있다.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는 서로 매우 비슷하여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하나의 언어로 취급되었지만 각국이 독립하면서 저마다 다른 표준을 따르며 각자 제갈길을 가고 있다.

정치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는 흥미로운 예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글을 쓸까 해서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세르보ㆍ크로아트^어(Serbo-Croat語)
『언어』
인도ㆍ유럽 어족 슬라브 어파의 남슬라브 어군에 속한 언어. 불가리아 어ㆍ슬로베니아 어ㆍ마케도니아 어 따위가 있으며, 세르비아ㆍ크로아티아 등지의 공용어이다.
여기서 뭔가 이상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가?

불가리아어가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일종이라고?

불가리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한 적이 없다. 불가리아어는 남슬라브어군에 속하기는 하지만 서부 남슬라브어인 세르보크로아트어와는 달리 동부 남슬라브어로 분류된다. 남슬라브어군의 계통도는 다음과 같다.
통상적으로 세르보크로아트어라고 부르는 것은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뿐이다. 슬로베니아어와 마케도니아어도 엄밀히는 세르보크로아트어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는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였으므로 이들이 쓰는 언어도 세르보크로아트어에 포함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나 불가리아어까지 세르보크로아트어에 포함시켰다는 것은 결국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세르보크로아트어를 통상적으로 쓰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남슬라브어군'이라는 개념과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 불가리아어의 한글 표기 용례 분석

그럼 지금까지 국립국어원에서는 불가리아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법을 적용했다는 것인가? 확인하기 위해서 국립국어원이 낸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서 불가리아어를 표기한 예를 찾아보았다.

불가리아어 지명
  • Burgas.  부르가스 :  ①불가리아 남동부의 주. ②부르가스 주의 주도.
  • Kazanluk.  카잔루크 :  불가리아 툰자(Tunja) 강 상류에 있는 도시.
  • Maritsa 강.  마리차 강 :  불가리아에 있는 강.
  • Pernik.  페르니크 :  불가리아 중서부에 있는 도시.
  • Plovdiv.  플로브디브 :  불가리아 중앙부의 도시.
  • Rhodopi 산맥.  로도피 산맥 :  불가리아 남서부에서 그리스 북동쪽 끝에 이르는 산맥.
  • Ruse.  루세 :  불가리아 북부 다뉴브 강 오른쪽 기슭에 위치한 항구 도시.
  • Sofia.  소피아 :  불가리아의 수도.
  • Stara Planina 산맥.  스타라플라니나 산맥 :  불가리아 중앙부의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 산맥.
  • Varna.  바르나 :  불가리아 북동부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
불가리아어 인명
  • Botev, Khristo.  보테프, 크리스토 :  불가리아의 시인·혁명가(1848~1876).
  • Dimitrov, Georgi Mikhailovich.  디미트로프,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  불가리아의 혁명 운동가·정치가(1882~1949).
  • Elin-Pelin.  엘린펠린 :  불가리아의 소설가(1877~1949).
  • Kostov, Ivan.  코스토프, 이반 :  불가리아의 정치가.
  • Mirtchev, Boyko.  미르체프, 보이코 :  불가리아의 외교관.
  • Purvanov, Georgi.  푸르바노프, 게오르기 :  불가리아의 대통령(1957~ ).
  • Simeon Sakskoburggotski.  시메온 삭스코부르고츠키 :  불가리아의 정치가(1937~ ). 시메온 이세.
  • Stoyanov, Petar.  스토야노프, 페타르 :  불가리아의 대통령.
  • Vazov, Ivan.  바조프, 이반 :  불가리아의 작가(1850~1921).
위의 내용을 분석해보자.

먼저 Plovdiv라는 지명은 '플로브디브'로 끝의 -v를 '브'로 적는데 Botev, Dimitrov 등 인명이 -v로 끝날 때는 '프'로 적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실제 원 발음이 달라서 표기를 다르게 한 것은 아니다. 불가리아어에서는 어말의 자음이 모두 무성음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어말의 -v는 [f]로 발음된다.

어말 자음이 무성음으로 발음되는 것은 거의 모든 슬라브어계 언어의 특징이다. 하지만 세르보크로아트어와 우크라이나어만은 예외이다. 그래서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따르면 어말의 -v도 '브'로 적게 되어있다. 예를 들어 세르비아의 정치인 Vojislav Koštunica는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로 표기한다.

혹시 Plovdiv의 한글 표기에만 세르보크로아트어 규정을 적용한 것 아닐까? 그러면 나머지 불가리아 인명은 왜 세르보크로아트어 규정을 적용하지 않았을까?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중간 이름을 '미하일로비치'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어식이고 불가리아어로는 '미하일로프(Mikhaylov)'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혹시 불가리아 인명을 모두 러시아어식으로 표기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머지 이름들은 모두 불가리아어식 이름을 원어로 쓰고 있다. 예를 들어 '페타르 스토야노프'는 러시아어식으로 표기한다면 '표트르 스토야노프'가 되어야 한다.

또 [x]를 나타내는 철자 kh는 '미하일로비치'에서처럼 'ㅎ'으로 적는 것이 원칙인데 Khristo는 '크리스토'라고 적고 있다. 더구나 로마자 표기 방식에 따라 이 음은 h로 적을 수도 있다. 실제 이 이름은 Hristo라는 표기로 더 잘 알려져있다.

달리 설명할 길은 없다. 외래어 표기법에 불가리아어 관련 규정이 없고 세르보크로아트어 관련 규정의 적용 범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혼동이 있어 불가리아어의 한글 표기가 일관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기준이 없으니 불가리아어의 한글 표기 방식은 그때 그때 표기를 결정한 사람에 따라 달라져 위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

'아', '우'로 둔갑하는 불가리아어의 ъ의 표기

그러면 기준을 세우기 위해 불가리아어 한글 표기에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적용하는 것은 어떨까? 아쉽게도 이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일단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가리아어와 세르보크로아트어는 어말 자음의 발음에서 차이가 난다. 불가리아어 인명은 -v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인데 발음에 따라 '프'로 표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축구 선수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를 불가리아어 발음에도 맞지 않게 '스토이치코브'라고 쓸 이유가 없다.

그리고 좀 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불가리아어는 영어에서 쓰는 로마문자가 아니라 러시아어에서 쓰는 키릴문자를 쓴다. 세르보크로아트어는 로마문자와 키릴문자 둘 다 사용하고 둘 사이에 거의 일대일 대응이 있기 때문에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불가리아어에 적용하는 것 자체는 대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불가리아어 발음에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지만). 예를 들어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불가리아어 표기는 София이다. 이는 세르보크로아트어식 로마문자·키릴문자 변환을 통해 Sofija로 옮길 수 있다. 여기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적용하면 '소피야'가 된다. '소피아'는 아마 영어나 라틴어식 이름을 따른 관용 표기일 것이다.

하지만 불가리아어에서는 세르보크로아트어에서 쓰지 않는 글자를 두 개 쓴다. 바로 щ와 ъ이다.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적용할래야 할 수가 없다.

그나마 щ는 [ʃt]라는 소리를 나타내므로 sht로 보고 적으면 된다. 하지만 ъ의 발음은 [ə] 또는 [ɤ]로 보통 나타내며 다른 슬라브어계 언어에서는 찾기 어려운 모음 소리이다.

불가리아어를 로마자로 적을 때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ъ의 표기는 ŭ, ǎ, u, a 등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위의 표기 용례에 나온 이름 가운데 원어에서 ъ로 표기되는 음이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 Kazanluk (Казанлък) 카잔
  • Purvanov, Georgi (Първанов, Георги) 르바노프, 게오르기
  • Stoyanov, Petar (Стоянов, Петър) 스토야노프, 페
'카잔루크'와 '푸르바노프'에서는 이 음을 '우'로 적었고 '페타르'에서는 이 음을 '아'로 적었다. 순전히 로마자로 표기된 이름만을 참조했기 때문에 같은 음이 이렇게 둘로 갈린 것이다. 그런데 같은 한국어 이름도 사람에 따라 로마자 표기를 다르게 적을 수 있는 것처럼, 불가리아어 이름의 로마자 표기도 여러 개가 쓰인다. Kazanluk는 Kazanlak로도 쓰이고 Purvanov는 Parvanov로도 쓰인다. 로마자 표기가 다른 방식으로 된 자료를 참고한다면 '카잔라크', '파르바노프'라는 표기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불가리아어를 일관된 기준으로 표기하려면 키릴문자로 된 원 표기를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럼 ъ는 어떻게 표기하는 것이 좋을까? 발음에 따른다면 '어'가 가장 가깝다. 이 발음은 [ə] 또는 [ɤ]로 적는다고 했는데 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 대조표에서 [ə]는 '어'로 적게 되어 있고 [ɤ]는 중국어의 한어병음 e, 베트남어의 ơ가 나타내는 모음을 표시할 때도 쓰는데 둘 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어'로 적게 되어 있다. 한국어의 '어' 발음을 [ɤ]로 표기하기도 한다.

'어'라는 표기를 사용하는 것이 생소하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지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표기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영어와 독일어의 Peter, Alexander에 해당하는 불가리아어 이름 Petǎr와 Aleksandǎr는 '페터르', '알렉산더르'가 된다. 끝의 r 발음을 나타내려 '르'를 붙인다는 것을 빼면 독일어식 '페터', '알렉산더'와 똑같아진다.

불가리아어 한글 표기 방식의 정립을 기대하며

글을 정리해보자. 국립국어원의 해명을 들어야겠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된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쓰는 의미와 달라 혼동의 우려가 있다. 특히 불가리아어를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일종이라 하고 있어 불가리아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 혼선을 빚을 수 있다.

하지만 불가리아어는 세르보크로아트어와 발음 규칙이 다르고 세르보크로아트어에는 없는 소리와 글자도 있어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을 적용할 수는 없다. 그래도 불가리아어에서 세르보크로아트어와 발음이 같은 글자는 세르보크로아트어 표기 규정에 따라 적되 어말에서는 자음을 무성음이 된 것으로 적고 특유의 모음 ъ는 '어'로 적으면 일관되고 자연스러운 표기 방식이 될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위의 목록에서 굵게 표시한 이름의 표기를 고친다면 다음과 같다.
  • 카잔루크 → 카잔러크
  • 플로브디브 → 플로브디프
  • 소피아 → 소피야
  • 보테프, 크리스토 → 보테프, 흐리스토
  • 푸르바노프, 게오르기 → 퍼르바노프, 게오르기
  • 스토야노프, 페타르 → 스토야노프, 페터르
이건 예로 든 것이고 꼭 위의 표기를 고치자는 것은 아니다. '소피아' 같은 표기는 관용 표기이며 딱히 고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불가리아어를 표기할 때는 제대로 된 기준을 세우고 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크리스토', '흐리스토'처럼 똑같은 불가리아어 이름이 로마자 표기 방식에 따라 한글 표기도 달라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언어 밸리가 생길 때까지 일반 외국어 관련 글 가운데 밸리에 보내고 싶은 것은 세계 밸리에 보냅니다.)

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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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에 "불가리아어가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일종이라니?"라는 제목으로 썼던 글에서 표준국어대사전의 세르보크로아트어 정의가 이상하게 되어 있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와 동시에 국립국어원에도 이것이 어떻게 된 것 ... more

  • 세계의 말과 글 : Slavoj는 '슬라보예'로 읽는다? 2010-08-04 09:34:33 #

    ... 베니아어와 세르보크로아트어는 언어분류상 꽤 가까운 언어이고 철자와 발음 규칙도 비슷한 것이 많으며 같은 슬로베니아가 옛 유고 연방의 일부였기 때문이다(불가리아어가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일종이라니? 참조). 이 이름의 발음은 한글로 옮기는 측면에서 보면 세르보크로아트어나 슬로베니아어나 대동소이하다. 어말의 파열음 [k]를 'ㄱ' 받침으로 ... more

덧글

  • 일곱 혼돈 2009/01/20 22:12 # 답글

    오,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나온 불가리아 소설 <발칸의 전설>에서는 불가리아식으로 표기하더군요. 역자분이 불가리아 유학을 갔다오셨다나.
  • 끝소리 2009/01/20 22:54 #

    그렇군요. 불가리아어를 아는 분이 번역해서 다행입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명 Йордан Йовков (Yordan Yovkov)를 '요르단 요프코프' 대신 '요르단 욥코프'로 표기하고 있네요. 러시아어 표기 규정에서처럼 자음 앞의 [f]를 'ㅂ' 받침으로 적는 방법을 택한 것 같습니다.
  • ghistory 2009/02/10 02:21 # 답글

    그림은 직접 작성하셨나요?
  • ghistory 2009/02/10 02:23 # 답글

    1996년경인가『한겨레』를 보니까 크로아티아에서는 일부러 언어의 차별성을 증가시키려고 중세 이전의 어휘들을 발굴해서 옛 어휘들들 대체하기 시작하여 이질화가 심화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게 아마「내가 본 유고슬라비아 · 유고슬라비아인」이라는 연재기사였을 거라 기억합니다.
  • ghistory 2009/02/10 02:26 # 답글

    그리고 이건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가 한양대학교에서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영어로 발언하면서 들려준 에피소드인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을 끝내는 데이턴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회담에서 크로아티아 대표들과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 대표들(='신유고연방'=곧 세르비아측)은 사실 통역이 필요 없었음에도 서로 별개 국가임을 강조하려는 제스처로 상대방이 말할 때 통역전달용 이어폰을 끼고 통역을 듣는 척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외국인 학자들과 임지현 교수와 저만 폭소했고, 유고슬라비아의 역사와 언어에 무지한 한국인 참석자들은 왜 웃는지 몰라 멀뚱멀뚱…
  • 끝소리 2009/02/10 02:51 #

    Inkscape에서 직접 작성했습니다. 대충 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더군요.-.-;;

    재미있는 일화네요. 비슷한 예로 마치 몰도바어가 루마니아어와 다른 언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몰도바어ㆍ루마니아어 사전까지 편찬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마케도니아어 역시 사실상 불가리아어와 같은 언어인데 마케도니아 내의 방언 가운데 표준 불가리아어와 가장 차이가 나는 쪽을 골라 일부러 불가리아어와 차별화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 ghistory 2009/02/10 02:59 # 답글

    참조하시라고 옮겨 봅니다.

    (전략)

    실로 유고슬라비아 내의 '민족' 단층선은 제대로 정의된 적이 없었다. 언어의 차이는 대표적 실례가 될 수 있다. 알바니아인과 슬로베니아인은 별개 언어들로 말한다. 마케도니아인은 마케도니아어(약간 변형된 형태의 불가리아어)로 말한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가 쓰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 의 '세르비아' 형태와 '크로아티아' 형태 사이의 차이는 작았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세르비아어는 키릴 문자를 쓰고 크로아티아어(그리고 보스니아어)는 라틴 문자를 쓴다. 그러나 두 '언어들' 은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약간의 문어들과 학술 용어들의 차이들 · 이따금씩 보이는 철자의 차이들 · 문자 'e' 의 상이한 발음들(크로아티아 형태의 '예카비안'[Ijekavian]의 'ye' 와 세르비아 형태의 '에카비안'[Ekavian]의 'e') 정도이다. 게다가 몬테네그로어는 세르비아처럼 키릴 문자로 쓰지만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처럼 '예카비안' 으로 발음한다. 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세르비아의 토박이들만이 '에카비안' 이형(異形)을 쓴다. 그리고 1992년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 내셔널리즘 지도자들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부터 떼어낸 지역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동료 주민들에게 공식 '세르비아' 발음, 곧 '에카비안' 을 강요했으나 거센 저항에 부딪쳤다.

    따라서 1974년에 '크로아티아어' 가-일단의 자그레브 지식인들이 1967년에 작성한 '언어에 관한 선언' 의 요구에 부응하여-크로아티아공화국의 공식 언어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다름아닌 신분 표식이었다. 크로아티아어는 자신의 연방에서 민족적 정체성의 표현은 무엇이든 억압했던 티토에게 크로아티아인들이 저항한 방식이었다. 몇몇 세르비아 작가들이 '순수한' 세르비아어를 보존하고 재확인하는 데 집착했던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소수의 내셔널리스트들이 조그만 차이들에 기인한 자기만족을 강조했던 반면 일반 대중은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한 언어를 말했다는 결론이 타당해 보인다. 이는 단일한 민족 언어의 여러 방언들 사이에 흔히 나타나는 차이들과는 대조적이다. 그 경우들에는 고장마다 용법들은 크게 다양해도 교육받은 엘리트는 공통의 '표준' 형태로 말하기 때문이다.

    (후략)

    토니 주트, 조행복 번역,『포스트워 1945~2005-2』(플래닛, 2008), pp.1908~1090.
  • ghistory 2009/02/10 03:00 #

    토니 주트가 실수로 보이보디나의 헝가리인들이 사용하는 헝가리어는 빠트렸습니다. 물론 더 엄청나게 많은 종족들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 ghistory 2009/02/10 03:29 # 답글

    영어 원문도 남겨 드립니다:

    (전략)

    Indeed the 'ethnic' fault-lines within Yugoslavia were never very well defined. The linguistic distinctions can serve as a representative illustration. Albanians and Slovenes speak distinct languages. Macedonians speak Macedonians(i.e. Bulgarian, with minor variations). But the differences between the 'Serb' and 'Croat' forms of 'Serbo-Croatian' as spoken by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the population were, and are, small indeed. serbs use the Cyrillic alphabet and Croats(and Bosnians) the Latin alphabet; but beyond some literary and scholarly terms, occasional spelling variations and a different pronunciation of the letter 'e'('ye' in the 'Ijekavian' or Croat form, 'e' in the 'Ekavian' or Serb variant) the two 'languages' are identical. Moreover, Montenegrins write in Cyrillic(like Serbs) but pronounce in the 'Ijekavian' manner, like Croats and Bosnians-as do the Serb residents of Bosnia-Herzegovina. Only the historical inhabitants of Serbia proper use the 'Ekavian' variant-and when Bosnian Serb nationalist leaders sought after 1992 to impose official 'Serbian'(i.e. 'Ekavian') pronunciation on their fellow Bosnian Serbs in the zone they had carved out of Bosnia-Herzegovina, they encountered overwhelming resistance.

    Thus the 'Croat' language recognized in 1974 as the official language of the Republic of Croatia-meeting the demands of a 1967 'Declaration on Language' drawn up by a group of Zagreb intellectuals-was above all an identity tag: a way for Croats to protest against Tito's suppression of all expressions of national identity in his federation. The same was true of certain Serb writers' obsession with preserving or re-affirming 'pure' Serbian. It seems fair to conclude that-in contrast to conventional differences between dialects of a single national language, where indigenous usage varies widely but educated élites tend to share a common 'correct' form-in former Yugoslavia it was the mass of the population who actually spoke an interchangeable single language, while a minority of nationalists sought to differentiate themselves by accentuating the narcissism of small differences.

    (후략)

    Tony Judt, Postwar: A History of Europe Since 1945,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 pp.630~631.
  • 끝소리 2009/02/10 05:37 #

    잘 읽었습니다. 이처럼 언어와 민족의 단층선이 애매한 것은 비단 옛 유고슬라비아 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유독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민족 논리에 심하게 이끌린 것 같습니다.

    보통 티토가 억압했던 민족주의가 폭발하면서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해석하지만 불가피한 결과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유고슬라비아의 다양한 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에스파냐처럼 지방 자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한 국가공동체를 유지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에스파냐는 프랑코 이후에도 분열되거나 전쟁을 치르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과격한 민족주의를 부추긴 정치인들이 냉전시대 비동맹국의 맹주였던 유고슬라비아를 전쟁과 학살의 도가니로 몰아간 것을 생각하면 착잡하기만 합니다.
  • ghistory 2009/02/10 13:41 #

    토니 주트는 이 책에서 원래 유럽은 퀼트 이불과 같이 여러 종족집단들이 겹쳐 있던 공간인데 1945년 이후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지적하고 있기도 합니다.
  • ghistory 2009/02/10 13:44 #

    토니 주트는 또한 지적하기를, 유고슬라비아는 대다수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제2차세계대전 기간과 종전 이후에 종족청소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집권 공산주의자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 책임을 전가할 유력한 소수민족들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면, 베오그라드의 공산주의자들은 내셔널리스트들로 변신하여 책임을 떠넘길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는 앞선 시기의 역사적 행운이 오히려 후대의 역사적 불행으로 작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 끝소리 2009/02/10 18:08 #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제2차세계대전 중 서로를 대규모로 학살하는 종족청소를 경험했기 때문에 후에 민족 문제로 걱정할 일이 없었고 지금은 언제 적이었냐는 것처럼 협력하는 관계가 된 건가요..

    사실 20세기 초의 상황과 비교해서 동유럽 각국의 민족 구성은 엄청나게 달라져서 각국의 소수민족이 확 줄어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폴란드 같은 경우는 거의 97%가 폴란드계라고 하죠. 두 차례 세계 대전을 포함한 혼란기를 거치면서 유대인은 물론 독일계, 우크라이나계, 헝가리계가 크게 감소했고 1968년에도 유대계 폴란드인 4만 명을 추방했다고 하니...

    국내에는 번역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Timothy Snyder의 "The Reconstruction of Nations: Poland, Ukraine, Lithuania, Belarus, 1569-1999"라는 책에서 불과 백 년 전의 이 퀼트 이불과 같은 상황이 어떻게 오늘날과 같이 되었는지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민족국가라는 새로운 틀에 맞게 민족 집단들이 수백만 명 단위로 이주되거나 학살된... 이런 과정을 통해 중유럽과 동유럽에서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같은 사태를 모면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깨끗하지만은 않네요.
  • ghistory 2009/02/11 02:01 #

    오해가 발생할 수 있게 적었나본데, 마치 서로 그런 과거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가장하고 살아가고들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평가일 것입니다.

    알려주신 책은 임지현 교수에게 알려서 번역할 만한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ghistory 2009/02/11 02:04 #

    토니 주트가『포스트워 1945~2005』에서 말하길,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서는 사람들은 그대로 있고 국경들이 움직였는데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서는 국경들은 원상태로 대체로 돌아간 반면 사람들이 움직였다고 적어서 두 시기의 역사적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2009년 3월 말에 이 문제를 한 장에서 다룬(전간기 동유럽의 소수민족문제) 마크 마조워(Mark Mazower)의『암흑의 대륙: 20세기 유럽』을 국내에서 출간합니다.
  • ghistory 2009/02/11 02:05 #

    1968년에도 유대계 폴란드인 4만 명을 추방했다고 하니...:

    이 추방은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의 이스라엘의 승리와 미국-이스라엘 동맹의 공식화에 따른 동유럽에서의 반시온주의 캠페인의 결과인데, 사실상 잠재해 있던 반유대주의를 부활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 ghistory 2009/02/11 16:00 # 답글

    정정합니다:

    1. 영어 원판 인용의 serbs use~→Serbs use~.

    2. 영어 원판 인용의 pp.630~631→pp.668~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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