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음성 기호

국제 음성 기호 (IPA, 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

본 블로그에서는 발음을 적을 때 불친절하게도 별다른 설명 없이 국제 음성 기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 [] 안에 쓴 것은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국제 음성 기호로 적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다른 언어의 발음을 한국어의 비슷한 발음을 통해 설명하거나 '굴리는 소리', '가래 끓는 소리' 등 비전문적인 용어를 통해 설명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유성 후치경 마찰음' 등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면 뜻은 명확해지지만 번거롭다. 그래서 전문적인 기준을 따르되 간편한 기호 체계를 통해 현존하는 여러 언어의 발음을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 국제 음성 기호이다.

위키백과의 국제 음성 기호 문서에 더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으며 국제 음성 기호에 대한 설명은 백과사전류, 언어학 서적 등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국제 음성 기호를 통해 나타낸 자음과 모음의 발음을 실제로 들을 수 있는 곳이 많이 있는데 하나만 소개하겠다. 에릭 암스트롱의 Voice & Speech Source라는 홈페이지에 실린 "IPA Charts" 페이지이다. 영어로 되어 있다.

같은 발음인데도 적는 방법이 달라지는 이유

국제 음성 기호는 언어에 상관 없이 한 가지 발음은 한 가지 기호에 대응시킨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이고 국제 음성 기호는 매우 유연한 표기 체계여서 실제로는 같은 발음을 적을 때도 사람마다 다른 기호를 쓰기도 하고, 같은 기호로 적은 발음이 실제로는 꽤 다르게 발음되는 경우가 있다.

국제 음성 기호에서는 기본 로마자 이외에도 그리스 문자나 소문자 크기의 대문자, 기존 글자를 뒤집거나 회전시킨 자형 등 여러 특수 문자를 기호로 사용하기 때문에 입력 또는 조판의 편의를 위해 가능하다면 기본 로마자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 모음 사이에 오는 'ㄹ', 영어의 r, 프랑스어의 r은 모두 발음이 다르며 정식으로는 각각 [ɾ], [ɹ], [ʁ]로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각 언어에서 비슷한 음은 하나 밖에 쓰이지 않으므로 어느 언어인지만 확실하다면 모두 [r]로 나타내도 혼동의 우려가 없다.

영어 모음 발음 표시의 예

예전에는 영어의 모음 발음을 표시할 때 필요한 특수 문자를 최소화하는 방식이 널리 쓰였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에서 나온 영어 발음 사전인 English Pronouncing Dictionary의 12판(1963년)까지 쓰던 방식으로 지금도 국내에서 쓰이는 여러 영어 사전에서 따르고 있다. 이 방식에서는 rid의 단모음과 reed의 장모음은 같은 기호인 [i]를 써서 표시하고 장모음 쪽만 장음 표시 [ː]를 붙여 표시한다. 앞서 말한대로 r을 간단히 [r]로 나타내는 방식에 따라 rid는 [rid], reed는 [riːd]로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u]와 [uː], [ɔ]와 [ɔː] 등의 기호를 사용해 각각 book과 boot, cod와 cord의 모음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rid와 reed, book과 boot, cod와 cord의 모음은 장단 뿐만 아니라 음가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 그래서 English Pronouncing Dictionary의 14판(1977년)부터는 이 모음들을 [ɪ]와 [iː], [ʊ]와 [uː], [ɒ]와 [ɔː]로 표시해서 모음의 장단 뿐만이 아니라 음가도 달라진다는 것을 명확히 표시했다. 현재는 이 방식이 널리 쓰이고 있고 원 발음에 더 가까운 표시이므로 본 블로그에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발음 자체가 일정하지 않다

또 실제 발음이 지역에 따라 달라지고 세대에 따라 달라지고 얼마나 빠르게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등 발음 자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국제 음성 기호 표기도 달라진다. 영어 boat의 장모음은 약 1900년경까지만 해도 영국이나 미국이나 [oʊ]로 발음했는데 영국에서는 이제 [əʊ]로 발음된다. 한국어의 'ㅡ'는 예전에는 [ɨ]에 가깝다고 보았으나 요즘은 [ɯ]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라고 한다. 특히 모음의 경우 변화의 속도가 빨라 국제 음성 기호 표기의 통일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간략 표기와 정밀 표기

또 발음을 얼마나 자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는지에 따라 국제 음성 기호 표시도 달라질 수 있다. 그 정밀도에 따라 음소마다 대표되는 발음에 따라 기호 하나를 정하는 수준인 간략 표기(broad transcription)가 있고 실제 발음을 세세하게 묘사하여 표기하는 정밀 표기(narrow transcription)가 있는데 보통 이 블로그에서는 간략 표기에 가까운 표기를 사용하되 여러 언어의 발음 구별에 유의미한 부분은 좀더 정밀하게 표기하는 방식을 쓴다.

예전에 '비빔밥'을 국제 음성 기호로 표기하면 [pibimp͈ap̚]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간략하게 표기하면 받침 'ㅂ'이 내파음이라는 것을 굳이 표시하지 않고 [pibimp͈ap]이라 적는 것으로도 충분하고 정밀하게 표기하면 [pʲibʲimp͈ap̚]이라고 적어 '비'와 '빔'의 'ㅂ'이 구개음화되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 보통 정밀 표기는 익숙하지 않은 기호를 많이 사용하고 모국어 화자에게는 잘 들리지 않는 변이음의 차이까지 따지므로 쓰기 어렵고 외국어의 한글 표기를 따지는 입장에서는 보통 그렇게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해당 언어를 잘 아는 사람들을 위해 발음을 설명할 때에는 음소(phoneme)를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를 하는 사람들끼리는 '비빔밥'은 /비빔빱/이라고 발음한다고 하면 충분하다. 이는 각 음소를 한글의 자모를 통해 표시한 것이고 각 음소마다 대표되는 국제 음성 기호로 나타내어 /bibimp͈ab/ 같은 방식으로 표기할 수도 있다. 음소 표시는 // 사이에 쓰고 음성 표시는 [] 사이에 쓴다. 음소 표시는 어떻게 분석하느냐에 따라 실제 발음되는 것과 큰 차이가 날 수가 있다. 그러니 국제 음성 기호를 쓴 음소 표시라도 있는 그대로 발음 기호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본 블로그에서는 개별 음소를 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음소 표시를 할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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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imc84 2009/01/03 08:22 # 답글

    마지막 학기에 말소리 뭐 하는 국어음운론 들으려다 전공과 겹쳐서 포기해버렸죠. 수업계획세에 IPA가 있어서 일부러 들으려던 건데, 요는 지금도 IPA를 제대로 모른단 것이지요..;

    어렴풋이 영어는 다양한 자음이나 반자음이 변별성이 높아서 모음에 그리 의존하지 않는 듯하고(특히 미국어) 한국어는 그 반대일 거라고 대충 생각하고 있었어요. 실제 현상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네요.

    한국어 홀소리가 단순체계로 바뀌는 중이란 건 현대국어의 일반적 경향이라고 들었던 듯한데 'ㅡ' 같은 것이 종래와 다른 소리란 건 전혀 모르던 거군요. 음소/음성 표시 구분을 따로 한다는 것도 몰랐는데 좋은 걸 배워 갑니다.
  • 끝소리 2009/01/03 09:57 #

    영어가 모음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지는 저도 생각해봐야겠네요. 얼핏 한국어와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느낌도 들지만, 영어에는 강세도 변별력이 있고 한국어보다 자음군이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ㅡ'의 음가가 변했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검색해보니 "http://ko.wikipedia.org/wiki/토론:한국어_음운론"에 여기에 관한 자세한 토론이 있네요. 제 짐작을 더해서 종합해보면 예전부터 [ɨ]와 [ɯ] 사이 어중간한 발음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ɯ]에 가깝게 발음하는 사람이 평균적으로 더 많다는 것 같습니다.

    국제 음성 기호 듣기를 하면 [ɨ]나 [ɯ]나 음가는 조금 차이가 나지만 제게는 둘 다'ㅡ'처럼 들립니다. 모음은 상당 부분 혀의 위치에 따라 음가가 정해지므로 비슷한 위치에서 발음하면 그 음소로 들리고, 시간이 흐르면 혀의 위치가 조금씩 바뀌면서 평균적인 음가가 조금씩 이동하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언젠가 한국어의 발음을 국제 음성 기호로 나타내는 문제에 관한 글을 연재할 생각도 하고 있는데 그 때는 좀 더 성실히 준비해서 설명을 시도해보겠습니다. 일상이 다시 바빠지면 언제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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