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왓'? 어말 [k, p, t]를 받침으로 적는 문제 표기 용례

세계 최대 규모의 사원이라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는 중세 크메르 제국 시대에 당시 수도인 앙코르에 세워졌다. 크메르어(캄보디아어)로 '앙코르' អង្គរ Ângkôr [ʔɑŋˈkɔː]는 '수도'라는 뜻이고 '와트' វត្ត Voat [ˈʋoat]는 '사원'이라는 뜻이다. '앙코르 와트'는 크메르어 발음을 직접 옮긴 것이 아니라 영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에서 쓰이는 로마자 철자인 Angkor Wat에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을 적용한 표기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앙코르^와트'로 실려 있으니 '앙코르와트'와 같이 붙여 써도 되고 '앙코르 와트'와 같이 띄어 써도 되지만 여기서는 원어의 단어 구분을 살려 띄어 쓰는 것으로 통일한다.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은 1986년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처음 공포된 뒤 발간된 《외래어 표기 용례집(지명·인명)》에서 한글 표기 기준이 세부적으로 마련되지 않은 언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 적용한 원칙을 일러두기의 형태로 제시한 것으다. 오늘날에도 외래어 표기법에서 아직 다루지 않는 언어의 한글 표기를 심의할 때 대체로 이 원칙을 적용한다.

앙코르 와트(Commons: sam garza, CC BY-2.0)

로마자 표기를 거치지 않고 오늘날 캄보디아의 공용어이기도 한 크메르어 이름 អង្គរវត្ត Ângkôr Voat의 현대 크메르어 발음 [ʔɑŋˌkɔː ˈʋoat]를 직접 한글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이 발음 기호에서 로마자 표기의 r가 발음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캄보디아에서 쓰이는 중부 방언을 포함한 현대 크메르어 대부분의 방언에서 음절말 /r/는 묵음이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앞으로 크메르어 표기법을 마련할 때 정해야 하겠지만 예전에는 발음되었던 음이고 크메르어 철자와 로마자 표기에서도 나타나며 태국 동북부에서 쓰이는 북크메르어 방언에서는 아직도 음절말의 /r/가 발음되니 한글 표기에서도 '르'로 적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크메르어에도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한국어와 비슷한 폐쇄음의 3계열 대립이 있으며 크메르어 철자에도 이게 나타난다. អង្គរ Ângkôr [ʔɑŋˈkɔː]의 k [k]는 한국어의 'ㄲ'처럼 무성 무기음으로 'ㅋ'와 비슷한 , kh [kʰ]와 대비된다. 한국어의 'ㄱ'에 대응되는 음은 없지만 'ㅂ, ㅍ, ㅃ', 'ㄷ, ㅌ, ㄸ'에 각각 대응되는 음이 있는 것이 타이어와도 비슷하다. 크메르어는 아직 외래어 표기법에서 다루지 않지만 타이어는 베트남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와 함께 2004년 12월 20일 외래어 표기법에 그 표기에 대한 규정이 추가되었는데 폐쇄음의 3계열 대립을 반영하여 타이어와 베트남어의 한글 표기에는 이례적으로 된소리 표기를 허용하였다. 그러니 크메르어 표기법을 마련한다면 타이어 표기법에서처럼 된소리 표기를 활용하여 អង្គរ Ângkôr는 '앙꼬(르)'로 적는 것이 좋을 것이다.

វត្ត Voat [ˈʋoat]의 표기는 더 까다로운 문제이다. 학자에 따라 [w], [β̞] 등으로 적기도 하는 첫 자음 v [ʋ]는 로마자 표기에서 v로 흔히 적지만 [w]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 좋겠다. 타이어 표기법에서도 로마자로 v로 흔히 적는 음을 [w]로 취급한다. 그런데 뒤따르는 이중모음 [oa]와 합칠 때는 '워아' 또는 '오아'로 적을지, 예외적으로 통용되는 로마자 표기와 가깝게 '와'로 적을지 고민된다. 이중모음 [oa]는 학자에 따라 [oə]로 적기도 한다.

일단 익숙한 '와'로 적기로 한다고 해도 저절로 វត្ត Voat가 '와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크메르어에서 어말의 [t]는 불파음(不破音), 즉 터뜨리지 않는 소리인 [t̚]이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hype [ˈhaɪ̯p], height [ˈhaɪ̯t], hike [ˈhaɪ̯k] 등의 단어를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할 때에는 어말의 [p], [t], [k] 등을 터뜨리기 때문에 '하이프', '하이트', '하이크'처럼 들리는데(물론 '으' 모음이 실제 있는 것은 아니고 [p], [t], [k]가 각각 초성 'ㅍ', 'ㅌ', 'ㅋ'인 것처럼 발음된다는 것을 흉내낸 것이다) 빠르게 발음할 때에는 파열 도중에 기류를 막아 '하입', '하잇', '하익' 비슷한 불파음이 될 수가 있다. 즉 영어에서는 어말 폐쇄음을 불파음으로 발음해도 되고 그러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선택 사항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어의 '밥', '밭', '밖'을 천천히 발음할 때의 영어처럼 '바브/바프', '바트', '바끄/바크'처럼 [p], [t], [k]를 터뜨려서 발음했다가는 딱 외국인 억양이 된다. 한국어에서는 어말 폐쇄음이 영어처럼 선택적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불파음이기 때문이다. 보통 발음 기호에서는 불파음 여부를 따로 나타내지 않지만 굳이 불파음이라는 것을 나타내려면 폐쇄음 기호의 오른쪽 위에 모서리 모양 부호를 더해서 [p̚], [t̚], [k̚] 등으로 적는다.

크메르어에서도 어말 폐쇄음은 필수적으로 불파음이므로 크메르어 발음을 살리려면 '와트'보다는 '왓'(또는 '워앗', '오앗')이 더 어울리는 표기이다. 하지만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에서는 어말의 무성 폐쇄음 [p], [t], [k]는 모두 '으'를 붙여 적도록 했기 때문에 '와트'로 쓰는 것이다. 세계의 여러 언어 가운데 어말 무성 폐쇄음이 불파음인 것은 상대적으로 드물기 때문에 그렇게 원칙을 정한 것이다.

크메르어에서 '사원'을 뜻하는 វត្ត Voat는 '울타리 친 장소'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वाट vāṭa에서 나왔다. 크메르 제국에서 쓴 말은 고대 크메르어이지만 문자 언어로는 고대 인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주로 썼으며 대부분의 기록을 산스크리트어로 남겼다. 산스크리트어는 크메르 제국 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문자 언어로 쓰여 옛 한국과 일본에서 문자 언어로 쓰인 한문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또 산스크리트어와 가까운 인도의 언어인 팔리어도 불경을 통해 동남아시아에 널리 전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크메르어 어휘의 상당수는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에서 왔다. '앙코르' អង្គរ Ângkôr도 어원을 따지면 결국에는 '도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낱말인 नगर nágara '나가라'에서 왔다. 이런 인도계 차용어는 크메르어 철자에 따른 일반적인 발음 규칙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크메르어를 배울 때 헷갈리기 쉽다. វត្ត Voat도 크메르어 철자만 보면 모음이 ô [ɔ]이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oa [oa]인 것은 인도계 차용어이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타이어도 마찬가지이다. 타이어의 วัด wat [wát] '왓'도 크메르어의 វត្ត Vôtt와 뜻과 어원이 같다. '새벽 사원'을 뜻하는 방콕의 왓 아룬(วัด อรุณ Wat Arun [wát ʔarun])을 예로 들 수 있다.

왓 아룬(Commons: Rolf Heinrich, Köln, CC BY-3.0)

'왓 아룬'은 2004년 12월 20일에 추가된 타이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이다. 타이어 표기법에서 음절말 폐쇄음은 받침으로 적는다. 이전에는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에 따라 '와트 아룬'으로 적어야 했지만 타이어 표기법의 제정으로 음절말 폐쇄음이 언제나 불파음으로 발음되는 실제 발음과 가깝게 '왓 아룬'으로 표기가 바뀐 것이다.

라오스의 공용어인 라오어에서 사원을 뜻하는 단어는 ວັດ wat [wat]이다. 라오 문자는 타이 문자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지만 라오어는 타이어와 서로 의사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가깝다. 타이어와 라오어가 동일 방언 연속체에 속한다고 보기도 한다. 발음도 상당 부분 비슷하며 음절말 폐쇄음이 불파음인 것도 당연히 같다. 그러니 라오어 ວັດ wat는 타이어 วัด wat처럼 '왓'으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라오어의 한글 표기를 심의할 때 타이어 표기법을 적용한 적이 없다. 그러니 현행 방식으로는 라오어 ວັດ wat는 '와트'로 적어야 한다.

예를 들어 라오스 루앙프라방에 있는 '황금 도시 사원'을 뜻하는 Wat Xieng Thong (라오어: ວັດຊຽງທອງ Wat Xiang Thong [wat síəŋ tʰɔ̌ːŋ])은 통용 로마자 표기에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을 적용하면 '와트 시엥 통'이다. 하지만 '왓 시엥 통'으로 적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사실 '도시'를 뜻하는 ຊຽງ xiang [síəŋ]의 이중모음을 어떻게 표기하느냐에 따라 '왓 시엉 통' 또는 '왓 시앙 통'이 더 나을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참고로 이에 대응되는 타이어 이름은 วัดเชียงทอง Wat Chiang Thong [wát ʨʰia̯ŋ tʰɔːŋ]이며 여기에 타이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왓 치앙 통'이다.

와트 시엥 통(Commons: Philip Maiwald, CC BY-3.0)

이처럼 '사원'을 뜻하는 크메르어의 វត្ត voat, 타이어의 วัด wat, 라오어의 ວັດ wat는 세 언어 모두 음절말 [t]가 불파음 [t̚]를 나타낸다. 하지만 현재 운이 좋게 표기법이 따로 있는 타이어 단어만 '왓'으로 적고 나머지 둘은 '와트'로 적는 것이 현행 방식이다. 앞으로 크메르어와 라오어 표기법이 마련된다면 타이어 표기법에서처럼 음절말 [t]를 받침 'ㅅ'으로 적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Pol Pot, ប៉ុល ពត Pŏl Pôt [pɔl pɔːt])도 '뽈 뽓'으로 표기가 바뀌고 흔히 '시엠립'이라고 부르고 표준 표기는 '시엠레아프'인 앙코르 와트의 관문인 Siem Reap(សៀមរាប Siĕm Réap [siəm riəp])도 '시엄리업'으로 바뀔 수도 있겠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다루는 언어 가운데 어말의 무성 폐쇄음 [p], [t], [k]를 예외 없이 받침으로 적게 하는 언어는 타이어와 베트남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등 2004년 12월 20일에 표기 규정이 추가된 동남아시아 3개 언어 뿐이다. 베트남어의 승려 Thích Nhất Hạnh [tʰǐk ɲɜ̌t hɐ̂ʔɲ]은 국내에 '틱낫한'으로 알려져 있는데 베트남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틱녓하인'이다. 통용되는 표기와 규정에 따른 표기 모두 'ㄱ', 'ㅅ' 받침을 썼다. 베트남어의 어말 폐쇄음도 불파음인 까닭이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 표기법에서는 한술 더 떠서 유성 폐쇄음 /b/, /d/, /ɡ/도 어말에서 받침으로 적게 했고 심지어 마찰음 /f/, /x/도 받침으로 적게 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의 통화 단위인 ringgit [riŋɡit]을 '링깃'으로 적을 뿐만이 아니라 이름인 Ahmad [a(h)mat]은 '아맛'으로 적고 Yusuf [jusuf]은 '유숩'으로 적는 것이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에서 음절말의 /b/, /d/, /ɡ/는 보통 불파음인 [p], [t], [k]로 발음되기 때문에 이렇게 정한 것이다. /f/, /x/도 외래 음소이니 각각 /p/, /k/와 합쳐질 수 있다고 보고 그렇게 정한 것 같은데 실제 발음을 관찰하면 적어도 /f/는 음절말에서도 마찰음으로 제대로 발음하니 이를 살려 Yusuf는 '유수프'와 같이 적는 것이 더 나았을 듯하다. 마찰음인 /s/는 어말에서 '스'로 적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기존 연구만 보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어말 폐쇄음이 필수적으로 불파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 kobalt [kobalt] '코발트' 같은 최근의 차용어에서는 폐쇄음이 어말 자음군의 마지막 자음이라서 한글로 옮길 때 받침으로 적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예외가 있더라도 어말 폐쇄음을 불파음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아가서 말레이인도네시아어 고유 어휘에서 철자상의 어말 -k는 성문 폐쇄음 [ʔ]로 발음되는데 이는 그 전에 불파음 [k̚]의 단계를 거쳤다는 것을 입증한다.

지금까지 살핀 언어와 같이 음절말, 특히 어말 무성 폐쇄음이 필수적으로 불파음인 언어는 주로 아시아에서 발견된다. 한국어를 비롯해 크메르어, 타이어, 라오어, 베트남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 모두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쓰이는 언어이다.

동남아시아 3개 언어 표기 규정이 추가되기 이전 외래어 표기법에서 다루는 아시아 언어는 중국어와 일본어 뿐이었다. 그런데 표준 중국어와 일본어에는 어말 폐쇄음이 없다. 즉 'ㅂ', 'ㅅ', 'ㄱ' 등의 받침으로 적을만한 음이 어말에 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한자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의 중국어는 어말 폐쇄음이 있었으며 지금도 표준 중국어가 속한 북방어를 제외한 광둥어, 민난어 등 다른 중국어계 언어에는 보통 어말 폐쇄음이 남아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불파음으로 발음된다. 기존 표기 용례 가운데 표준 중국어 이외의 다른 중국어계 언어 발음을 따른 것들이 종종 있는데 여기서 어말 폐쇄음은 받침으로 적는다. 홍콩의 첵랍콕(Chek Lap Kok, 광둥어: 赤鱲角 Cek3laap6gok3 [ʦʰɛ̄ːk.làːp.kɔ̄ːk]) 공항, 싱가포르의 고촉통(Goh Chok Tong, 민난어: 吴作栋 Gô Chok-tòng [ɡɔ̌ ʦɔk tɔ̭ŋ]) 전 총리를 예로 들 수 있다. 영어에서 쓰는 로마자 표기를 거친 간접적인 한글 표기이긴 하지만 앞으로 광둥어와 민난어 표기법을 따로 마련한다고 해도 받침으로 적을 것이다.

홍콩 쳅락콕 국제공항(Commons: Wylkie Chan, CC BY-3.0)

중국어와 같이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티베트어와 버마어도 어말 폐쇄음이 불파음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티베트어 이름인 དགེ་ལེགས་ dge legs Gelek [kèlèʔ, -lèk]은 '겔레그'나 '겔레크' 대신 '겔렉'으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와 비슷하게 티베트어에서도 어말 -k는 보통 성문 폐쇄음 [ʔ]으로 발음되고 격식을 갖출 때나 [k]로 발음한다.

그런데 버마어에서는 비슷한 현상이 다른 자음에도 적용되어 음절말의 -k, -t, -p, -s 등이 수세기 전에 이미 모두 성문 폐쇄음 [ʔ]로 합쳐졌다. 하지만 통용되는 로마자 표기에서는 이들이 아직도 발음되는 것처럼 적을 때가 많다. Chauk라고 보통 쓰이는 미얀마 지명 ချောက် Hkyauk이 한 예이다. 이 지명은 기존 용례에 '차우크'로 나와있지만 '차우'로 적는 것이 실제 발음에 가깝다. 실제로 더 최근에 심의된 Kyaukpyu로 보통 쓰이는 미얀마 지명 ကျောက်ဖြူ Kyaukhpru는 철자상의 음절말 -k를 무시한 '차우퓨'로 표기가 정해졌다. 하지만 앞으로 버마어 표기법을 정할 때 만약 성문 폐쇄음이 없는 경우와의 구별을 위해 이를 일부러 나타낸다면 '차욱'이든 '차웃'이든 받침을 써서 나타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필리핀에서 쓰는 타갈로그어도 어말 무성 폐쇄음이 불파음이다(대신 말레이인도네시아어와 달리 유성 폐쇄음은 음절말에서도 무성음화하지 않고 분명하게 발음된다). 필리핀 지명 가운데 Tarlac는 기존 표기 용례에서 '타를라크'로 쓰는데 '타를락'으로 적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필리핀에는 표준 필리핀어의 바탕이 되는 타갈로그어 외에도 지역마다 쓰이는 언어가 백여 개가 되지만 거의 모두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말레이·폴리네시아 어파에 속하여 계통이 같으니 필리핀의 고유 언어를 표기할 때는 어말 무성 폐쇄음을 불파음으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가 공용어로 쓰이지만 자바어, 순다어, 이반어 등 계통이 같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지역별 고유 언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렇다고 아시아의 언어가 다 어말 무성 폐쇄음을 불파음으로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몽골어를 비롯하여 위구르어, 우즈베크어, 페르시아어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언어와 벵골어, 힌디어, 타밀어를 비롯한 남아시아의 여러 언어는 어말 무성 폐쇄음을 받침으로 처리하기 곤란하다. 그러고 보면 어말 무성 폐쇄음이 필수적으로 불파음인 것은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버마어, 티베트어, 중국어 등이 쓰이는 지역을 경계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나타나는 지역적인 현상이다. 오스트로아시아 어족에 속하는 크메르어와 베트남어, 크라·다이 어족(타이·카다이 어족)에 속하는 타이어와 라오어,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에 속하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와 타갈로그어, 다른 언어와의 친연 관계가 밝혀진 것이 없는 한국어 등 계통이 다른 여러 언어들에서 나타나므로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한 상호 영향에 따른 것으로 봐야 하겠다.

크메르어, 라오어 등 아직 외래어 표기법에서 다루지 않는 언어의 표기 세칙을 제대로 마련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아직 표기법이 마련되어있지 않더라도 이제부터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언어를 표기할 때 어말 파열음을 받침으로 적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적어도 사원을 뜻하는 단어가 타이어로는 '왓'이고 크메르어와 라오어로는 '와트'가 되는 불일치는 해결할 수 있겠다.

외계 행성 일곱 개를 거느린 '트라피스트-1'과 벨기에 맥주 이야기 어원

벨기에의 천문학자 미카엘 지용(프랑스어: Michaël Gillon [mikaɛl ʒijɔ̃])이 이끄는 국제 연구진은 22일 지구에서 39광년 떨어진 왜성 주위에 지구와 크기가 비슷한 암석 행성 일곱 개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이들 가운데 적어도 세 개, 어쩌면 일곱 개 모두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추정되어 특히 관심을 끌고 있다.

연구진이 '지구의 일곱 자매'로 별명을 지은 행성들이 주위를 돌고 있는 왜성의 이름은 TRAPPIST-1이다. 국내 언론 보도를 보니 한글 표기는 처음 보도될 때에는 '트라피스트-1'과 '트래피스트-1'이 혼용되다가 점차 '트라피스트-1'로 통일되고 있는 듯하다.

트라피스트-1의 상상도

왜성 트라피스트-1은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 있는 라시야(라틴아메리카 에스파냐어: La Silla [la siˈʝa]) 관측소의 트라피스트(TRAPPIST) 망원경에서 이름을 땄다. 영어로 '통과 행성 및 미행성 소형 망원경–남쪽'을 뜻하는 Transiting Planets and Planetesimals Small Telescope–South를 줄인데 흔히 '트라피스트회'라고 부르는 가톨릭 교회 수도회인 엄률 시토회(라틴어: Ordo Cisterciensis Strictoris Observantiae)에서 이름을 따서 그렇게 지었다. '트라피스트(프랑스어: trappiste [tʁapistə])'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라 트라프(프랑스어: la Trappe [la tʁapə]) 수도원에서 출발한 수도회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TRAPPIST의 영어 발음 [ˈtɹæp.ᵻst]를 기준으로 표기하면 '트래피스트'이지만 수도회 이름은 원래의 프랑스어 발음에 따라 '트라피스트'로 쓰며 망원경과 왜성의 이름은 수도회 이름을 딴 것이니 '트라피스트'로 표기를 통일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서는 대부분 성 베네딕토가 6세기에 작성한 수도 규칙서(라틴어: Regula Benedicti)를 따라 노동을 중요시하여 수입을 위해 치즈, 빵, 초콜릿 등을 생산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일부 수도원에서 생산하는 맥주가 유명하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뛰어난 맛과 품질로 국제적인 명성을 누린다. 오늘날 맥주를 생산하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은 벨기에에 여섯 곳, 네덜란드에 두 곳, 오스트리아와 미국, 이탈리아에 각각 한 곳씩 있다. 그러니 트라피스트 맥주라고 하면 보통 벨기에에서 생산된 것을 떠올린다.

트라피스트 맥주를 생산하는 벨기에의 양조장은 다음 여섯 곳이다.
  • Achel 네덜란드어: [ˈɑxəl] '아헐'
  • Chimay 프랑스어: [ʃimɛ] '시메'
  • Orval 프랑스어: [ɔʁval] '오르발'
  • Rochefort 프랑스어: [ʁɔʃəfɔːʁ] '로슈포르'
  • Westmalle 네덜란드어: [ʋɛstˈmɑlə] '베스트말러'
  • Westvleteren 네덜란드어: [ʋɛstˈfleːtərən] '베스트블레테런'
이 가운데 특히 벨기에 북서부의 베스트블레테런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베스트블레테런 12'는 세계 최고의 맥주로 꼽히기도 한다. 네덜란드어 발음은 사실 '베스트플레터런' 또는 벨기에식으로 '웨스트플레터런'에 가깝지만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베스트블레테런'이다. 벨기에 사람들은 트라피스트 맥주를 포함해서 자국에서 생산되는 맥주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트라피스트 맥주 모음(Wikimedia: Philip Rowlands, CC BY-SA 4.0)

트라피스트 망원경이 사실 지용이 소속된 벨기에 리에주 대학에서 조종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칠레에 있는 망원경이 왜 하필 맥주로 유명한 트라피스트회의 이름을 땄는지의 수수께끼가 자연스럽게 풀린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개최한 기자 회견을 통해 이번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연구진은 행성 일곱 개의 이름은 지을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행성들은 현재 트라피스트-1b, 트라피스트-1c 등 b에서 h까지의 글자를 붙여 부르지만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는 이름도 지을 생각인지를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지용은 연구진끼리는 벨기에 맥주의 이름을 붙이자는 얘기를 했지만 공식 이름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 같다고 답했다. 재미있는 발상이지만 정말로 이들에게 '베스트블레테런' 같은 발음하기 힘든 이름을 붙이면 네덜란드어를 못하는 이들은 꽤나 고생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언어학자가 인류의 미래를 책임지는 영화: 컨택트(Arrival) 영화와 언어

거대한 외계 비행물체 12개가 미국의 몬태나 주를 포함한 지구 곳곳에 출현한다. 얼마 후 미군은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루이즈 뱅크스(에이미 애덤스 분) 박사를 찾아 외계인의 언어를 해석해줄 것을 요청한다. 과연 뱅크스는 외계인의 언어를 해석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지구에 왔는지 밝혀낼 수 있을까?

얼마 전에 한국에서 개봉한 캐나다의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의 2016년작 영화 《컨택트》는 이처럼 언어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나는 것은 SF(science fiction,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에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지만 외계인과 어떻게 의사소통이 가능할지를 진지하게 탐구한 작품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언어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보기 드문 영화이니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해가면서 언어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려 한다.

《컨택트》의 한국판 포스터

영화 《컨택트》의 영어 원제는 '도착'을 뜻하는 Arrival '어라이벌'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하필이면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동명 소설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1997년에 영화화한 《콘택트》와 비슷하게 제목을 붙였다(원제는 Contact). 이 작품도 외계인이 보낸 메시지를 해독하는 것을 다루는 SF 영화인데 국내 제목을 비슷하게 지어놓았으니 헷갈리기도 하고 국내에서 성공했던 1997년 영화에 기대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의 소지가 있다. 국내 제목을 붙인 쪽에서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컨택트》에 등장하는 대형 외계 비행물체가 콘택트렌즈 모양이기는 하다.

영어 contact /ˈkɒn.tækt/를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콘택트'이다. 영어의 모음 음소 /ɒ/는 영국 발음에서 [ɒ]로, 미국 발음에서 [ɑː]로 발음되며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오'로 적는 것이 원칙이고 경우에 따라 미국 발음을 따라 '아'로 적기도 한다(예: column /ˈkɒl.əm/ '칼럼'). 그러니 contact /ˈkɒn.tækt/는 '콘택트'로 적는 것이 원칙이고 미국 발음을 따른다고 해도 '컨택트'가 아니라 '칸택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콘택트'가 표준어로 실려있다. 하지만 concept /ˈkɒn.sɛpt/, conference /ˈkɒn.fəɹ‿ənts/ 등을 외래어 표기 원칙에 따른 '콘셉트', '콘퍼런스' 대신 '컨셉(트)', '컨퍼런스'라고 흔히 쓰는 것처럼 표준 표기인 콘택트 대신 '컨택(트)'로 쓰기도 하기 때문에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 같다.

그런데 영어 contact가 I will contact you에서처럼 동사로 쓰일 경우 명사와 마찬가지로 /ˈkɒn.tækt/로 발음하기도 하지만 둘째 음절에 강세를 주어 /kən.ˈtækt/로 발음하기도 한다. 이 경우의 발음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컨택트'이다. 하지만 영화 제목은 '접촉', '연락'을 뜻하는 명사로 봐야지 동사로 보고 읽지는 않는다.

영화 《컨택트》의 원작은 미국의 SF 작가 테드 챙(Ted Chiang, 중국어 이름은 姜峯楠 '장펑난')의 1998년작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이다. 영화로 만들면서 원작 소설과 상당히 달라지기도 했고 원래의 제목이 로맨틱 코미디인 것처럼 들린다고 해서 제목을 Arrival로 바꿨다.

영화 초반에 뱅크스 박사를 찾아온 미군의 웨버 대령(포리스트 휘터커 분)은 뱅크스가 예전에 '파르시(Farsi)'를 해독하는데 도움을 줄 때 나온 기밀 취급 허가가 아직 남아있다고 설명을 한다. 영어의 Farsi는 이란에서 쓰는 페르시아어를 페르시아어를 페르시아어로 فارسی ‎fārsi라고 하는데서 나온 이름인데 비교적 최근인 20세기에 쓰기 시작한 이름으로 예전에는 그냥 페르시아어라는 뜻인 Persian으로 불렀으며 지금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Persian이라고 부른다.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국어일 뿐만이 아니라 타지키스탄에서 쓰는 타지크어, 아프가니스탄의 다리어도 같은 페르시아어의 방언이다. 그러니 미군에서도 중요하게 취급하는 언어이다. 그러니 페르시아어 번역은 어학병이나 현지 계약자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언어학자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실제로 영화 제작 과정에서 언어 관련 부분 자문을 맡은 캐나다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교의 언어학자 제시카 쿤(Jessica Coon) 교수는 뱅크스가 페르시아어 대신 파키스탄 북부의 부루쇼족이 쓰는 부루샤스키어와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소수 언어를 번역한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워싱턴 포스트》 기사 참조).

제시카 쿤은 뱅크스가 웨버에 의해 '번역의 달인' 정도로 소개되는 부분도 바꾸려고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언어학자는 언어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을 다루지 번역을 주로 하지는 않는다. 언어학자라고 꼭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웨버는 뱅크스에게 외계인이 내는 소리를 녹음한 것을 들려주며 해석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 뱅크스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외계인과 직접 대면해서 의사소통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웨버가 외계인을 접근하게 허락해줄 수는 없다며 버클리 대학교의 언어학자를 찾아가려 하자 뱅크스 박사는 그 언어학자에게 산스크리트어로 '전쟁'이란 낱말이 무엇이며 해석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라고 한다. 얼마 후 돌아온 웨버는 뱅크스에게 '전쟁'은 산스크리트어로 gavisti이며 '논쟁(an argument)'이라고 해석했다고 전한다. 뱅크스는 같은 단어를 '소를 더 원하는 것(a desire for more cows)'이라고 해석한다. 이에 웨버는 뱅크스를 다른 언어학자 대신 뱅크스를 데리고 가기로 결심한다.

산스크리트어 गविष्टि gáviṣṭi '가비슈티'는 '전쟁'보다는 '전투'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소'를 뜻하는 गो 에 '원하는 것'을 뜻하는 इष्टि ‎iṣṭi가 합친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소털이가 분쟁의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어원인데 문화와 언어는 떼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든 예 같다. 하지만 보통 말하는 '전쟁'이란 뜻의 단어로는 युद्धम् yuddhám '유담'이 있으니 영화에서 쓴대로는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은 다리가 일곱 개라고 하여 고대 그리스어로 '일곱'을 뜻하는 ἑπτά heptá '헵타'에서 온 hepta-와 '다리'를 뜻하는 πούς poús '푸스'의 속격형 ποδός podós '포도스'에서 온 -pod를 합친 '헵타포드(heptapod)'라고 부른다. 뱅크스 박사의 노력으로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미군의 웨버 대령(포리스트 휘터커 분)은 뱅크스 박사에게 빨리 외계인들에게 온 목적을 물어볼 수 없냐고 다그친다. 그러자 뱅크스 박사는 '캥거루'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선원들이 주머니에 새끼를 넣고 뛰어다니는 동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원주민에게 물어보았더니 '캥거루'라고 대답해서 그렇게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캥거루'는 원주민의 언어로 '못 알아듣겠다'라는 뜻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고 나서 웨버 대령이 자리를 뜨자 이를 듣고 있던 물리학자 이언 도널리(제러미 레너 분)이 뱅크스 박사에게 훌륭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자 뱅크스 박사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지만 말하고자 하는 논지를 전달한다고 대답한다.

'캥거루'라는 이름의 유래〉라는 글에서 다룬 것처럼 '캥거루'라는 영어 이름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언어 가운데 하나인 구구이미디르어에서 실제로 캥거루를 부른 이름에서 나왔지 '못 알아듣겠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면서 언어학자인 주인공이 잘못된 상식을 퍼뜨리는 것으로 보여 걱정했는데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도 일부러 대령을 속인 것이었다.

외계인들의 언어는 실제 언어학자의 자문을 통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을 누설하지는 않겠다. 영화에서는 사고가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외계인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외계인과 같이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피어·워프 가설은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이 그들이 쓰는 언어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는 언어결정론으로 볼 수 있다. 이 강한 가설은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구나 촘스키를 필두로 언어의 보편적인 특징을 강조하게 된 20세기 중반에는 개별 언어의 차이에 따른 영향을 다룬 사피어·워프 가설은 찬밥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후 여러 연구를 통해 제한적으로 상황에 따라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약한 가설을 뒷받침할만한 결과도 나왔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언어학자 로만 야콥손은 '본질적으로 언어는 전달해야 하는 것에서 차이가 나지 전달할 수 있는 것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Languages differ essentially in what they must convey and not in what they may convey)'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각각의 언어는 전달해야 하는 필수 요소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높임말을 쓰기 때문에 끊임없이 말하는 상대를 비롯하여 거론되는 여러 이들의 상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높임말을 쓰지 않은 영어와 같은 언어를 쓰는 이보다 여기에 신경을 쓰게 되어있다. 한국어를 쓰는 이는 영어를 쓰는 이에게는 없는 초능력이 있어서 언제 높임말을 쓸지 아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세계를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언어에서 필수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부분을 더 신경쓰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오감을 통해 세계를 인지하면서 시시각각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두뇌는 그 가운데에 사고를 위해 필수적인 정보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걸러낸다. 이 과정에서 언어에 따라 필수적인 정보가 무엇인지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피어·워프 가설에 따라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은 이미 모든 이들이 세계를 인지하는 것 가운데 자신의 언어에서 요구하는 부분에 따라 특정 부분에 집중적으로 신경을 써서 그러는 것이지 다른 언어의 화자들이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터득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는 분명히 다른 생명체인 외계인의 언어를 배운다고 그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까지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은 판타지다운 시적 허용으로 이해해야 하겠다.

뱅크스는 딸 해나(Hannah)에게 Hannah가 회문(回文), 즉 거꾸로 읽어도 제대로 읽은 것과 같은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영어로는 '팰린드롬(palindrome)'이라고 한다. 영화의 미국 개봉일은 11월 11일이었고 한국 개봉일은 2월 2일이었던 것도 비슷한 의도로 보인다.

언어와 관계된 세부적인 사항 가운데 이런저런 아쉬운 점이 있지만 언어학자를 그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손에 쥔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언어와 생각의 관계와 같은 깊은 주제를 다룬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많지만 상대방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지, 진정한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지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었으면 좋겠다. 자동 번역기 기술이 나날이 발전해서 가까운 미래에는 언어의 장벽이 무너질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언어에 담긴 상대방의 문화와 사고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장벽은 남아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폴란드 여행기 1부: 키예프에 도착하다 여행기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의 관문인 보리스필(Бориспіль Boryspil')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한낮이었다. 밤에는 영하 15도로 내려가는 한겨울이었지만 지금은 햇볕이 들어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터미널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에 가보니 안내문이 우크라이나어로만 써있었다. 폴란드와 유로 2012를 공동 개최하면서 대중교통에 영어 안내문을 많이 추가했다고 들었지만 여기에는 영어 안내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어는 같은 동슬라브어군에 속하는 러시아어와 벨라루스어처럼 키릴 문자로 쓴다. 키릴 문자를 모르는 관광객들은 무척 고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크라이나 방문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처음 방문한 것은 2004년 여름으로 한 달 가까이 지내면서 수도 키예프와 동부의 하르키우(Харків Kharkiv), 남부의 오데사(Одеса Odesa), 크림 반도의 잔코이(Джанкой Dzhankoi, 크림타타르어: Canköy '장쾨이') 등 여러 곳에 가보았지만 우크라이나 서부에는 갈 기회가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지난번에 가지 못한 서부의 르비우(Львів L'viv)를 보고 국경을 넘어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ów)까지 가볼 계획이었다.

보아하니 공항에서 하르키우스카(Харківська Kharkivs'ka) 지하철역까지 가는 요금이 50흐리우냐(약 2천원)였고 피우덴니(Південний Pivdennyi) 기차역, 즉 키예프 남역까지는 요금이 좀 더 비쌌다. 그래서 버스 기사에게서 하르키우스카까지 가는 표를 샀다.

하르키우스카에서 내려서 지하철역이 어디 있는지 찾느라 두리번거리니 같이 버스에서 내린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근처의 지하 통로를 가리키며 '메트로(метро metro, 지하철)'라고 일러주셨다. 고맙다고 우크라이나어로 '댜쿠유(дякую dyakuyu)'라고 말하고 지하 통로를 따라 역에 들어가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시내로 향했다. 지하철 요금은 4흐리우냐(약 2백원)였다. 원래도 물가가 싸지만 요즘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사태 때문에 흐리우냐(гривня hryvnya)의 가치가 폭락했기 때문에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유럽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저렴한 곳이다.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Києво-Печерська лавра Kyievo-Pechers'ka lavra '키예보페체르스카 라우라')

우크라이나의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대부분의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후에는 나라 전체가 소련의 지배를 받은 역사 때문에 러시아어를 쓰는 주민이 많다. 제정 러시아 시절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에 대규모로 정착하면서 러시아어는 도시의 언어가 되었으며 도시로 이주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어를 배워야 했다. 제정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어 출판을 금지하고 모든 교육을 러시아어로 시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지배하에 들어간 지역에서는 비러시아 민족에 관대한 '토착화' 또는 '현지화'를 뜻하는 '코레니자치야(러시아어: коренизация korenizatsiya, 우크라이나어: коренізація korenizatsiya)' 정책에 편승하여 한동안 우크라이나어 교육과 출판이 장려되었다. 하지만 1929년 이후 소련의 민족 정책이 180도 바뀌면서 우크라이나어 보급에 힘썼던 당 지도부는 대대적으로 숙청되었고 실질적인 러시아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1980년 이후에는 모든 학생들이 1학년부터 러시아어를 배우도록 했다.

이 때문에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고 우크라이나어가 공용어로 지정된지 25년이 넘었지만 특히 소련 시절에 교육받은 세대는 러시아어를 쓰는 이들이 많다. 특히 키예프는 주민 대부분이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쓰는 듯하다. 우크라이나에 가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우크라이나인 부부도 서로 러시아어로 말했고 공항에서도 안내 방송은 우크라이나어로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십중팔구 러시아어였다. 러시아어 방송이나 신문도 많다.

하지만 젊은 세대일수록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반발로 소련 시절에 교육받은 세대 중에도 우크라이나어를 더 많이 쓰려 노력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인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둘 다 구사할 수 있으며 둘을 섞어 쓰는 이들도 많기 때문에 언어 사용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벨라루스어는 모두 동슬라브어군에 속하니 상당히 긴밀한 친연 관계에 있는 언어들이다. 하지만 특히 어휘에 있어서 꽤 다른 것들도 많다. 우크라이나어로 고맙다는 말은 '댜쿠유(дякую dyakuyu [ˈdʲa.ku.ju])'이지만 러시아어로는 전혀 다른 '스파시보(спасибо spasibo [spɐ.ˈsʲi.bə])'이다(모음 약화 때문에 '스파시바' 비슷하게 들린다).

우크라이나어의 '댜쿠유'와 벨라루스어의 '자쿠유(дзякую dzjakuju [ˈʣʲa.ku.ju])'는 오히려 서슬라브어군에 속하는 폴란드어의 '지엥쿠예(dziękuję [ʥɛŋ.ˈku.jɛ])'와 뿌리가 같다. 모두 '감사하다'라는 뜻의 고대 고지독일어 dankon을 차용하여 슬라브어식 동사로 만든 것의 활용형이다. 고대 고지독일어의 dankon은 현대 독일어에서 danken이 되었고 독일어로 고맙다는 말인 '당케(danke [ˈdaŋ.kə])'는 그 활용형이다. 영어의 '생크(thank [ˈθæŋk])'도 뿌리가 같다. 즉 우크라이나어에서는 고맙다는 말은 러시아어가 아니라 서쪽의 폴란드어에서 온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오랫동안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 때문에 우크라이나어에는 이처럼 폴란드어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뒤에 더 자세하게 하고자 한다.

졸로티보로타 지하철역에는 역 이름인 ЗОЛОТІ ВОРОТА ZOLOTI VOROTA가 중세풍의 옛 글자체로 쓰여있다.

숙소는 '금문(金門)'을 뜻하는 졸로티보로타(Золотi ворота Zoloti vorota) 지하철역 근처에 있었다. 졸로티보로타 역은 중세 키예프 대공국의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모자이크로 장식된 아치로 덮여있어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지하철역으로 손꼽힌다. 승강장은 지하 96.5미터에 있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없이 올라가서 이제 지상에 도착했나 했더니 지하에 있는 중간 홀이였고 또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했다.

키예프 대공국의 건축을 연상시키는 졸로티보로타 역의 승강장

11세기 중반에 세워진 졸로티보로타는 키예프 대공국 시절 키예프의 주된 성문이었다. 하지만 1240년에 몽골군에 의해 일부 파괴된 후 방치되어 폐허로만 남아있다가 소련 시절인 1982년에 현재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재건했다. 졸로티보로타의 원래 모습은 알 수가 없어 순전히 상상에 따라 재건한 것이라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졸로티보로타, 즉 '금문'의 현재 모습

키예프는 동슬라브인들이 최초로 건설한 고대 국가의 중심지였다. 인도·유럽 어족의 한 갈래인 슬라브어파 여러 언어를 쓰는 슬라브인들은 유럽 중동부 어딘가에서 살다가 5~6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이들이 비운 땅에 일부가 들어가 폴란드인, 체코인 등 오늘날의 서슬라브인들의 조상이 되었고 일부는 발칸 반도로 들어가 불가리아인, 옛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슬라브계 민족 등 오늘날의 남슬라브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의 조상이 된 동슬라브인들은 드네프르 강, 드네스트르 강, 볼가 강 유역에 해당하는 방대한 지역에 퍼졌다.

동슬라브인들은 북쪽으로는 발트어를 쓰는 발트족(오늘날의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등의 조상)과 우랄어족의 여러 언어를 쓰는 핀족(오늘날의 핀란드인, 에스토니아인 등의 조상), 남쪽으로는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여러 언어를 쓰는 불가르족, 하자르족 등과 이웃했다. 그러다가 8세기경 지금의 스웨덴 출신의 바이킹들이 발트해를 건너 동슬라브인들이 살던 지역에 진출하여 무역과 노략질에 종사했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용병으로 활약하면서 붙은 이름인 '바랑기아인'으로 역사에 알려져있다.

바랑기아인들은 동슬라브 지역의 고대 국가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류리쿠(고대 동슬라브어: Рюрикъ ‎Rjurikŭ, 고대 노르드어: Rørikr '뢰리크르', 러시아어: Рюрик ‎Ryurik '류리크', 우크라이나어: Рюрик ‎Ryuryk '류리크')라는 이름의 바랑기아인 수장이 9세기에 오늘날의 러시아 라도가 호수 근처에서 권력을 장악했으며 그의 아들인 올리구(고대 동슬라브어: Ольгъ Olĭgŭ 또는 Ѡльгъ Ōlĭgŭ, 고대 노르드어 Helgi '헬기', 러시아어: Олег Oleg '올레크', 우크라이나어: Олег Oleh '올레흐')는 882년 드네프르 강가의 키예프에 수도를 세웠다.

이들이 세운 고대 국가의 주민은 대부분 동슬라브인이었다. 지배 계층인 바랑기아인들을 고대 동슬라브어로 루시(Рѹ́сь Rúsĭ)라고 했다. 현대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로는 루스(Русь Rus')라고 한다(다만 현행 러시아어 표기법으로는 '루시'로 쓴다). 핀란드어와 에스토니아어로 각각 스웨덴을 가리키는 이름인 Ruotsi '루오치', Rootsi '로치'와 뿌리가 같다는 설이 유력하다. 바랑기아인들은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동슬라브인들과 동화되었기 때문에 루스는 바랑기아인들이 세운 고대 국가 뿐만이 아니라 그 주된 주민인 동슬라브인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중세 그리스어로 이들을 로스(Ῥῶς Rhôs)라고 했다. 나라는 로시아(Ῥωσία Rhōsía)라고 불렀다. 이것이 라틴어 루시아(Russia)를 거쳐서 영어에서 쓰는 이름인 러샤(Russia), 한글 통용 표기로는 '러시아'가 되었다. 중세 그리스어 로시아는 현대 러시아어 '로시야(Россия Rossiya)'가 되었다.

하지만 루스와 러시아는 동의어가 아니다. 중세 루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동슬라브인들이 오늘날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로 분화되기 전이다.

루스를 라틴어로 루테니아(Ruthenia)라고 부르기도 했다. 후에 루테니아는 옛 루스 땅 가운데 리투아니아 대공국 또는 폴란드 왕국의 지배를 받으며 로마 문자권에 들어간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방을 주로 이르게 되었다.

벨라루스(벨라루스어: Беларусь Biełaruś)라는 국명은 원래 '하얀 루스'를 뜻하는 말에서 왔다. 그런데 많은 언어에서 루스와 러시아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하얀 러시아'를 뜻하는 이름으로 번역한다. 한국어에서도 예전에는 종종 '백러시아'라는 이름을 썼다.

초기 루스는 노브고로드(러시아어: Новгород Novgorod) 공국과 폴라츠크(벨라루스어: Полацк Polatsk, 러시아어: Полоцк Polotsk) 공국도 포함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중심지는 키예프(러시아어: Киев Kiev, 우크라이나어: Київ Kyiv '키이우')였고 키예프의 대공이 루스 전체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초기 루스를 '키예프 루스'라고 이름지었다.

우크라이나의 한 이동통신 회사에서 자사 로고를 응용하여 설치한 I*KYIV 조형물

'키예프' 및 영어 이름 Kiev는 [ˈkʲi.ɪf]로 발음되는 러시아어 이름에 따른 표기이다. 우크라이나어 이름은 [ˈkɪ.jiu̯] '키이우'로 발음된다. 1992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의 붕괴로 독립을 얻은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어식인 Kiev 대신 우크라이나어 이름에 따른 로마자 표기인 Kyiv를 보급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우크라이나 국내의 모든 공문서나 표지판에서 Kyiv를 쓰는 것은 물론 외국의 여러 국제 기구나 정부 기관, 일부 언론에서도 Kyiv를 채택했다. 하지만 영어권 일반인들은 압도적으로 Kiev라고 알고 있으며 영어권 주요 언론에서도 전통 표기인 Kiev를 계속 쓰는 곳이 많다. 그나마 이것은 영어권 이야기이고 한국에서는 '키예프' 대신 '키이우'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우크라이나의 여러 고유명사는 우크라이나어를 기준으로 적지만 키예프만은 러시아어식 관용 표기로 적는다. 참고로 키예프를 고대 동슬라브어로는 '크이예부(Кꙑѥвъ ‎Kyjevŭ)'라고 했다.

중세 역사서에 따르면 10세기 후반 키예프의 대공이 된 볼로디매루(고대 동슬라브어: Володимѣръ ‎Volodiměrŭ)는 슬라브인의 토속 신앙 대신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자들을 유럽 각지에 보내 여러 종교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음주를 금지하니 마음에 들지 않았고 유대교의 신은 자신이 선택한 민족이 나라를 빼앗기도록 허락한 힘없는 신으로 보였다. 로마 가톨릭교는 예식이 따분해 보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본 그리스 정교 예식은 볼로디매루가 보낸 사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래서 988년 볼로디매루는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고 이를 키예프 루스의 국교로 채택했다.

볼로디매루는 우크라이나어로 볼로디미르(Володимир Volodymyr), 러시아어로 블라디미르(Владимир Vladimir)로 알려져있다. 사실 그가 그리스 정교로 개종한 것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생각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이는 그 후 동슬라브인의 역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이 되었으며 후에 성인으로 떠받들여졌다. 오늘날 키예프의 중심부에는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이 있다. 1852년 모스크바의 관구장주교가 블라디미르/볼로디미르가 기독교로 개종한 9백주년을 기념하여 키예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제안해서 네오비잔틴 양식으로 1882년 건물을 완공하고 벽화까지 모두 완성이 된 1896년 축성식을 가졌다. 오늘날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키예프 총대주교청 소속이다.

키예프의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

이 글에서는 일부러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러시아·벨라루스가 나눠지기 이전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세 루스의 인명을 고대 동슬라브어 형태로 썼지만 보통은 류리크와 올레크, 블라디미르 등 러시아어 형태를 쓴다. 키예프 루스를 곧 고대 러시아로 보는 러시아의 사관을 그대로 답습한 탓도 있겠지만 소련 시절에는 우크라이나어와 벨라루스어가 따로 있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사어가 된 고대 동슬라브어는 말할 것도 없으니 비교적 잘 알려진 러시아어 형태를 쓰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키예프 루스의 인물들이 러시아 사람인지 우크라이나 사람인지 벨라루스 사람인지 묻는 것은 한국 고대사 인물들이 북한 사람인지 남한 사람인지 묻는 것처럼 말이 되지 않지만 언어 가운데 하나를 고르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이는 마치 영어 등 유럽 언어에서 중국의 역사 인명을 적을 때 광둥어, 민난어, 하카어 등이 아닌 표준 중국어 발음을 따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키예프 루스의 인명은 보통 러시아어 형태로 쓰되 우크라이나 또는 벨라루스 역사에 한정해서 언급할 때에는 각각의 경우에 맞게 우크라이나어 또는 벨라루스어 형태를 쓰는 것이 좋겠다.

키예프 대공국은 11세기말 이후 분열되어 쇠퇴하다가 1240년대 몽골군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인구가 십만이 넘던 당시로서는 대도시였던 키예프는 몽골군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그 후 키예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키예프는 독립을 선언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볼셰비키 군이 지원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흡수되었다. 1922년에 소련이 출범할 때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초대 구성국 가운데 하나였다. 소련은 말이 좋아 동등한 연방이지 사실은 모든 구성국들이 모스크바의 지배를 받았다.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에 맞서 볼셰비키 군이 지원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도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하르코프(러시아어: Харьков Khar'kov, 현행 외래어 표기법대로는 '하리코프'), 즉 오늘날의 하르키우(Харків Kharkiv)였다. 이것이 소련 출범 후에도 계속되다가 1934년에야 키예프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선언하였고 키예프는 다시 비로소 독립국의 수도가 되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는 곧바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기념하여 이름지어진 독립 광장으로 향했다. 2004년 여름에 방문한 이후 키예프의 독립 광장은 두 차례 혁명의 주 무대가 되었으니 어떻게 모습이 바뀌었는지 궁금했다.

'끝소리' 페이스북 페이지와 영어판 누리집 kkeutsori.com을 새로 개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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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 누리집은 이곳에 쓴 블로그 글의 영어판도 올리고 영어로 된 다른 자료들도 올릴 생각입니다. 특히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영어로 번역해서 올려놓았습니다(Loanword Transcription Rules 참조). 아마도 외래어 표기법을 전부 번역하여 영어로 소개하는 것은 사상 최초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kkeutsori.com에는 이미 최근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 가운데 일곱 개를 영어로 번역해서 올렸습니다.
앞으로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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