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자가 인류의 미래를 책임지는 영화: 컨택트(Arrival) 영화와 언어

거대한 외계 비행물체 12개가 미국의 몬태나 주를 포함한 지구 곳곳에 출현한다. 얼마 후 미군은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루이즈 뱅크스(에이미 애덤스 분) 박사를 찾아 외계인의 언어를 해석해줄 것을 요청한다. 과연 뱅크스는 외계인의 언어를 해석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지구에 왔는지 밝혀낼 수 있을까?

얼마 전에 한국에서 개봉한 캐나다의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의 2016년작 영화 《컨택트》는 이처럼 언어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나는 것은 SF(science fiction,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에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지만 외계인과 어떻게 의사소통이 가능할지를 진지하게 탐구한 작품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언어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보기 드문 영화이니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해가면서 언어에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려 한다.

《컨택트》의 한국판 포스터

영화 《컨택트》의 영어 원제는 '도착'을 뜻하는 Arrival '어라이벌'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하필이면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동명 소설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1997년에 영화화한 《콘택트》와 비슷하게 제목을 붙였다(원제는 Contact). 이 작품도 외계인이 보낸 메시지를 해독하는 것을 다루는 SF 영화인데 국내 제목을 비슷하게 지어놓았으니 헷갈리기도 하고 국내에서 성공했던 1997년 영화에 기대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의 소지가 있다. 국내 제목을 붙인 쪽에서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컨택트》에 등장하는 대형 외계 비행물체가 콘택트렌즈 모양이기는 하다.

영어 contact /ˈkɒn.tækt/를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콘택트'이다. 영어의 모음 음소 /ɒ/는 영국 발음에서 [ɒ]로, 미국 발음에서 [ɑː]로 발음되며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오'로 적는 것이 원칙이고 경우에 따라 미국 발음을 따라 '아'로 적기도 한다(예: column /ˈkɒl.əm/ '칼럼'). 그러니 contact /ˈkɒn.tækt/는 '콘택트'로 적는 것이 원칙이고 미국 발음을 따른다고 해도 '컨택트'가 아니라 '칸택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콘택트'가 표준어로 실려있다. 하지만 concept /ˈkɒn.sɛpt/, conference /ˈkɒn.fəɹ‿ənts/ 등을 외래어 표기 원칙에 따른 '콘셉트', '콘퍼런스' 대신 '컨셉(트)', '컨퍼런스'라고 흔히 쓰는 것처럼 표준 표기인 콘택트 대신 '컨택(트)'로 쓰기도 하기 때문에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 같다.

그런데 영어 contact가 I will contact you에서처럼 동사로 쓰일 경우 명사와 마찬가지로 /ˈkɒn.tækt/로 발음하기도 하지만 둘째 음절에 강세를 주어 /kən.ˈtækt/로 발음하기도 한다. 이 경우의 발음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컨택트'이다. 하지만 영화 제목은 '접촉', '연락'을 뜻하는 명사로 봐야지 동사로 보고 읽지는 않는다.

영화 《컨택트》의 원작은 미국의 SF 작가 테드 챙(Ted Chiang, 중국어 이름은 姜峯楠 '장펑난')의 1998년작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이다. 영화로 만들면서 원작 소설과 상당히 달라지기도 했고 원래의 제목이 로맨틱 코미디인 것처럼 들린다고 해서 제목을 Arrival로 바꿨다.

영화 초반에 뱅크스 박사를 찾아온 미군의 웨버 대령(포리스트 휘터커 분)은 뱅크스가 예전에 '파르시(Farsi)'를 해독하는데 도움을 줄 때 나온 기밀 취급 허가가 아직 남아있다고 설명을 한다. 영어의 Farsi는 이란에서 쓰는 페르시아어를 페르시아어를 페르시아어로 فارسی ‎fārsi라고 하는데서 나온 이름인데 비교적 최근인 20세기에 쓰기 시작한 이름으로 예전에는 그냥 페르시아어라는 뜻인 Persian으로 불렀으며 지금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Persian이라고 부른다.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국어일 뿐만이 아니라 타지키스탄에서 쓰는 타지크어, 아프가니스탄의 다리어도 같은 페르시아어의 방언이다. 그러니 미군에서도 중요하게 취급하는 언어이다. 그러니 페르시아어 번역은 어학병이나 현지 계약자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언어학자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실제로 영화 제작 과정에서 언어 관련 부분 자문을 맡은 캐나다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교의 언어학자 제시카 쿤(Jessica Coon) 교수는 뱅크스가 페르시아어 대신 파키스탄 북부의 부루쇼족이 쓰는 부루샤스키어와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소수 언어를 번역한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워싱턴 포스트》 기사 참조).

제시카 쿤은 뱅크스가 웨버에 의해 '번역의 달인' 정도로 소개되는 부분도 바꾸려고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언어학자는 언어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을 다루지 번역을 주로 하지는 않는다. 언어학자라고 꼭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웨버는 뱅크스에게 외계인이 내는 소리를 녹음한 것을 들려주며 해석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 뱅크스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외계인과 직접 대면해서 의사소통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웨버가 외계인을 접근하게 허락해줄 수는 없다며 버클리 대학교의 언어학자를 찾아가려 하자 뱅크스 박사는 그 언어학자에게 산스크리트어로 '전쟁'이란 낱말이 무엇이며 해석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라고 한다. 얼마 후 돌아온 웨버는 뱅크스에게 '전쟁'은 산스크리트어로 gavisti이며 '논쟁(an argument)'이라고 해석했다고 전한다. 뱅크스는 같은 단어를 '소를 더 원하는 것(a desire for more cows)'이라고 해석한다. 이에 웨버는 뱅크스를 다른 언어학자 대신 뱅크스를 데리고 가기로 결심한다.

산스크리트어 गविष्टि gáviṣṭi '가비슈티'는 '전쟁'보다는 '전투'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소'를 뜻하는 गो 에 '원하는 것'을 뜻하는 इष्टि ‎iṣṭi가 합친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소털이가 분쟁의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어원인데 문화와 언어는 떼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든 예 같다. 하지만 보통 말하는 '전쟁'이란 뜻의 단어로는 युद्धम् yuddhám '유담'이 있으니 영화에서 쓴대로는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은 다리가 일곱 개라고 하여 고대 그리스어로 '일곱'을 뜻하는 ἑπτά heptá '헵타'에서 온 hepta-와 '다리'를 뜻하는 πούς poús '푸스'의 속격형 ποδός podós '포도스'에서 온 -pod를 합친 '헵타포드(heptapod)'라고 부른다. 뱅크스 박사의 노력으로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미군의 웨버 대령(포리스트 휘터커 분)은 뱅크스 박사에게 빨리 외계인들에게 온 목적을 물어볼 수 없냐고 다그친다. 그러자 뱅크스 박사는 '캥거루'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선원들이 주머니에 새끼를 넣고 뛰어다니는 동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원주민에게 물어보았더니 '캥거루'라고 대답해서 그렇게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캥거루'는 원주민의 언어로 '못 알아듣겠다'라는 뜻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고 나서 웨버 대령이 자리를 뜨자 이를 듣고 있던 물리학자 이언 도널리(제러미 레너 분)이 뱅크스 박사에게 훌륭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자 뱅크스 박사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지만 말하고자 하는 논지를 전달한다고 대답한다.

'캥거루'라는 이름의 유래〉라는 글에서 다룬 것처럼 '캥거루'라는 영어 이름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언어 가운데 하나인 구구이미디르어에서 실제로 캥거루를 부른 이름에서 나왔지 '못 알아듣겠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면서 언어학자인 주인공이 잘못된 상식을 퍼뜨리는 것으로 보여 걱정했는데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도 일부러 대령을 속인 것이었다.

외계인들의 언어는 실제 언어학자의 자문을 통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을 누설하지는 않겠다. 영화에서는 사고가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외계인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외계인과 같이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피어·워프 가설은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이 그들이 쓰는 언어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는 언어결정론으로 볼 수 있다. 이 강한 가설은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구나 촘스키를 필두로 언어의 보편적인 특징을 강조하게 된 20세기 중반에는 개별 언어의 차이에 따른 영향을 다룬 사피어·워프 가설은 찬밥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후 여러 연구를 통해 제한적으로 상황에 따라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약한 가설을 뒷받침할만한 결과도 나왔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언어학자 로만 야콥손은 '본질적으로 언어는 전달해야 하는 것에서 차이가 나지 전달할 수 있는 것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Languages differ essentially in what they must convey and not in what they may convey)'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각각의 언어는 전달해야 하는 필수 요소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높임말을 쓰기 때문에 끊임없이 말하는 상대를 비롯하여 거론되는 여러 이들의 상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높임말을 쓰지 않은 영어와 같은 언어를 쓰는 이보다 여기에 신경을 쓰게 되어있다. 한국어를 쓰는 이는 영어를 쓰는 이에게는 없는 초능력이 있어서 언제 높임말을 쓸지 아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세계를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언어에서 필수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부분을 더 신경쓰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오감을 통해 세계를 인지하면서 시시각각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두뇌는 그 가운데에 사고를 위해 필수적인 정보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걸러낸다. 이 과정에서 언어에 따라 필수적인 정보가 무엇인지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피어·워프 가설에 따라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은 이미 모든 이들이 세계를 인지하는 것 가운데 자신의 언어에서 요구하는 부분에 따라 특정 부분에 집중적으로 신경을 써서 그러는 것이지 다른 언어의 화자들이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터득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는 분명히 다른 생명체인 외계인의 언어를 배운다고 그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까지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은 판타지다운 시적 허용으로 이해해야 하겠다.

뱅크스는 딸 해나(Hannah)에게 Hannah가 회문(回文), 즉 거꾸로 읽어도 제대로 읽은 것과 같은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영어로는 '팰린드롬(palindrome)'이라고 한다. 영화의 미국 개봉일은 11월 11일이었고 한국 개봉일은 2월 2일이었던 것도 비슷한 의도로 보인다.

언어와 관계된 세부적인 사항 가운데 이런저런 아쉬운 점이 있지만 언어학자를 그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손에 쥔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언어와 생각의 관계와 같은 깊은 주제를 다룬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많지만 상대방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지, 진정한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지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었으면 좋겠다. 자동 번역기 기술이 나날이 발전해서 가까운 미래에는 언어의 장벽이 무너질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언어에 담긴 상대방의 문화와 사고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장벽은 남아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폴란드 여행기 1부: 키예프에 도착하다 여행기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의 관문인 보리스필(Бориспіль Boryspil')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한낮이었다. 밤에는 영하 15도로 내려가는 한겨울이었지만 지금은 햇볕이 들어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터미널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에 가보니 안내문이 우크라이나어로만 써있었다. 폴란드와 유로 2012를 공동 개최하면서 대중교통에 영어 안내문을 많이 추가했다고 들었지만 여기에는 영어 안내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어는 같은 동슬라브어군에 속하는 러시아어와 벨라루스어처럼 키릴 문자로 쓴다. 키릴 문자를 모르는 관광객들은 무척 고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크라이나 방문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처음 방문한 것은 2004년 여름으로 한 달 가까이 지내면서 수도 키예프와 동부의 하르키우(Харків Kharkiv), 남부의 오데사(Одеса Odesa), 크림 반도의 잔코이(Джанкой Dzhankoi, 크림타타르어: Canköy '장쾨이') 등 여러 곳에 가보았지만 우크라이나 서부에는 갈 기회가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지난번에 가지 못한 서부의 르비우(Львів L'viv)를 보고 국경을 넘어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ów)까지 가볼 계획이었다.

보아하니 공항에서 하르키우스카(Харківська Kharkivs'ka) 지하철역까지 가는 요금이 50흐리우냐(약 2천원)였고 피우덴니(Південний Pivdennyi) 기차역, 즉 키예프 남역까지는 요금이 좀 더 비쌌다. 그래서 버스 기사에게서 하르키우스카까지 가는 표를 샀다.

하르키우스카에서 내려서 지하철역이 어디 있는지 찾느라 두리번거리니 같이 버스에서 내린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근처의 지하 통로를 가리키며 '메트로(метро metro, 지하철)'라고 일러주셨다. 고맙다고 우크라이나어로 '댜쿠유(дякую dyakuyu)'라고 말하고 지하 통로를 따라 역에 들어가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시내로 향했다. 지하철 요금은 4흐리우냐(약 2백원)였다. 원래도 물가가 싸지만 요즘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사태 때문에 흐리우냐(гривня hryvnya)의 가치가 폭락했기 때문에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유럽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저렴한 곳이다.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Києво-Печерська лавра Kyievo-Pechers'ka lavra '키예보페체르스카 라우라')

우크라이나의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대부분의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후에는 나라 전체가 소련의 지배를 받은 역사 때문에 러시아어를 쓰는 주민이 많다. 제정 러시아 시절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에 대규모로 정착하면서 러시아어는 도시의 언어가 되었으며 도시로 이주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어를 배워야 했다. 제정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어 출판을 금지하고 모든 교육을 러시아어로 시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지배하에 들어간 지역에서는 비러시아 민족에 관대한 '토착화' 또는 '현지화'를 뜻하는 '코레니자치야(러시아어: коренизация korenizatsiya, 우크라이나어: коренізація korenizatsiya)' 정책에 편승하여 한동안 우크라이나어 교육과 출판이 장려되었다. 하지만 1929년 이후 소련의 민족 정책이 180도 바뀌면서 우크라이나어 보급에 힘썼던 당 지도부는 대대적으로 숙청되었고 실질적인 러시아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1980년 이후에는 모든 학생들이 1학년부터 러시아어를 배우도록 했다.

이 때문에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고 우크라이나어가 공용어로 지정된지 25년이 넘었지만 특히 소련 시절에 교육받은 세대는 러시아어를 쓰는 이들이 많다. 특히 키예프는 주민 대부분이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쓰는 듯하다. 우크라이나에 가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우크라이나인 부부도 서로 러시아어로 말했고 공항에서도 안내 방송은 우크라이나어로 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십중팔구 러시아어였다. 러시아어 방송이나 신문도 많다.

하지만 젊은 세대일수록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반발로 소련 시절에 교육받은 세대 중에도 우크라이나어를 더 많이 쓰려 노력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인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둘 다 구사할 수 있으며 둘을 섞어 쓰는 이들도 많기 때문에 언어 사용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 벨라루스어는 모두 동슬라브어군에 속하니 상당히 긴밀한 친연 관계에 있는 언어들이다. 하지만 특히 어휘에 있어서 꽤 다른 것들도 많다. 우크라이나어로 고맙다는 말은 '댜쿠유(дякую dyakuyu [ˈdʲa.ku.ju])'이지만 러시아어로는 전혀 다른 '스파시보(спасибо spasibo [spɐ.ˈsʲi.bə])'이다(모음 약화 때문에 '스파시바' 비슷하게 들린다).

우크라이나어의 '댜쿠유'와 벨라루스어의 '자쿠유(дзякую dzjakuju [ˈʣʲa.ku.ju])'는 오히려 서슬라브어군에 속하는 폴란드어의 '지엥쿠예(dziękuję [ʥɛŋ.ˈku.jɛ])'와 뿌리가 같다. 모두 '감사하다'라는 뜻의 고대 고지독일어 dankon을 차용하여 슬라브어식 동사로 만든 것의 활용형이다. 고대 고지독일어의 dankon은 현대 독일어에서 danken이 되었고 독일어로 고맙다는 말인 '당케(danke [ˈdaŋ.kə])'는 그 활용형이다. 영어의 '생크(thank [ˈθæŋk])'도 뿌리가 같다. 즉 우크라이나어에서는 고맙다는 말은 러시아어가 아니라 서쪽의 폴란드어에서 온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오랫동안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 때문에 우크라이나어에는 이처럼 폴란드어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뒤에 더 자세하게 하고자 한다.

졸로티보로타 지하철역에는 역 이름인 ЗОЛОТІ ВОРОТА ZOLOTI VOROTA가 중세풍의 옛 글자체로 쓰여있다.

숙소는 '금문(金門)'을 뜻하는 졸로티보로타(Золотi ворота Zoloti vorota) 지하철역 근처에 있었다. 졸로티보로타 역은 중세 키예프 대공국의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모자이크로 장식된 아치로 덮여있어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운 지하철역으로 손꼽힌다. 승강장은 지하 96.5미터에 있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없이 올라가서 이제 지상에 도착했나 했더니 지하에 있는 중간 홀이였고 또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했다.

키예프 대공국의 건축을 연상시키는 졸로티보로타 역의 승강장

11세기 중반에 세워진 졸로티보로타는 키예프 대공국 시절 키예프의 주된 성문이었다. 하지만 1240년에 몽골군에 의해 일부 파괴된 후 방치되어 폐허로만 남아있다가 소련 시절인 1982년에 현재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재건했다. 졸로티보로타의 원래 모습은 알 수가 없어 순전히 상상에 따라 재건한 것이라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졸로티보로타, 즉 '금문'의 현재 모습

키예프는 동슬라브인들이 최초로 건설한 고대 국가의 중심지였다. 인도·유럽 어족의 한 갈래인 슬라브어파 여러 언어를 쓰는 슬라브인들은 유럽 중동부 어딘가에서 살다가 5~6세기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이들이 비운 땅에 일부가 들어가 폴란드인, 체코인 등 오늘날의 서슬라브인들의 조상이 되었고 일부는 발칸 반도로 들어가 불가리아인, 옛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슬라브계 민족 등 오늘날의 남슬라브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의 조상이 된 동슬라브인들은 드네프르 강, 드네스트르 강, 볼가 강 유역에 해당하는 방대한 지역에 퍼졌다.

동슬라브인들은 북쪽으로는 발트어를 쓰는 발트족(오늘날의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등의 조상)과 우랄어족의 여러 언어를 쓰는 핀족(오늘날의 핀란드인, 에스토니아인 등의 조상), 남쪽으로는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여러 언어를 쓰는 불가르족, 하자르족 등과 이웃했다. 그러다가 8세기경 지금의 스웨덴 출신의 바이킹들이 발트해를 건너 동슬라브인들이 살던 지역에 진출하여 무역과 노략질에 종사했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용병으로 활약하면서 붙은 이름인 '바랑기아인'으로 역사에 알려져있다.

바랑기아인들은 동슬라브 지역의 고대 국가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류리쿠(고대 동슬라브어: Рюрикъ ‎Rjurikŭ, 고대 노르드어: Rørikr '뢰리크르', 러시아어: Рюрик ‎Ryurik '류리크', 우크라이나어: Рюрик ‎Ryuryk '류리크')라는 이름의 바랑기아인 수장이 9세기에 오늘날의 러시아 라도가 호수 근처에서 권력을 장악했으며 그의 아들인 올리구(고대 동슬라브어: Ольгъ Olĭgŭ 또는 Ѡльгъ Ōlĭgŭ, 고대 노르드어 Helgi '헬기', 러시아어: Олег Oleg '올레크', 우크라이나어: Олег Oleh '올레흐')는 882년 드네프르 강가의 키예프에 수도를 세웠다.

이들이 세운 고대 국가의 주민은 대부분 동슬라브인이었다. 지배 계층인 바랑기아인들을 고대 동슬라브어로 루시(Рѹ́сь Rúsĭ)라고 했다. 현대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로는 루스(Русь Rus')라고 한다(다만 현행 러시아어 표기법으로는 '루시'로 쓴다). 핀란드어와 에스토니아어로 각각 스웨덴을 가리키는 이름인 Ruotsi '루오치', Rootsi '로치'와 뿌리가 같다는 설이 유력하다. 바랑기아인들은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동슬라브인들과 동화되었기 때문에 루스는 바랑기아인들이 세운 고대 국가 뿐만이 아니라 그 주된 주민인 동슬라브인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중세 그리스어로 이들을 로스(Ῥῶς Rhôs)라고 했다. 나라는 로시아(Ῥωσία Rhōsía)라고 불렀다. 이것이 라틴어 루시아(Russia)를 거쳐서 영어에서 쓰는 이름인 러샤(Russia), 한글 통용 표기로는 '러시아'가 되었다. 중세 그리스어 로시아는 현대 러시아어 '로시야(Россия Rossiya)'가 되었다.

하지만 루스와 러시아는 동의어가 아니다. 중세 루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동슬라브인들이 오늘날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로 분화되기 전이다.

루스를 라틴어로 루테니아(Ruthenia)라고 부르기도 했다. 후에 루테니아는 옛 루스 땅 가운데 리투아니아 대공국 또는 폴란드 왕국의 지배를 받으며 로마 문자권에 들어간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방을 주로 이르게 되었다.

벨라루스(벨라루스어: Беларусь Biełaruś)라는 국명은 원래 '하얀 루스'를 뜻하는 말에서 왔다. 그런데 많은 언어에서 루스와 러시아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하얀 러시아'를 뜻하는 이름으로 번역한다. 한국어에서도 예전에는 종종 '백러시아'라는 이름을 썼다.

초기 루스는 노브고로드(러시아어: Новгород Novgorod) 공국과 폴라츠크(벨라루스어: Полацк Polatsk, 러시아어: Полоцк Polotsk) 공국도 포함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중심지는 키예프(러시아어: Киев Kiev, 우크라이나어: Київ Kyiv '키이우')였고 키예프의 대공이 루스 전체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초기 루스를 '키예프 루스'라고 이름지었다.

우크라이나의 한 이동통신 회사에서 자사 로고를 응용하여 설치한 I*KYIV 조형물

'키예프' 및 영어 이름 Kiev는 [ˈkʲi.ɪf]로 발음되는 러시아어 이름에 따른 표기이다. 우크라이나어 이름은 [ˈkɪ.jiu̯] '키이우'로 발음된다. 1992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의 붕괴로 독립을 얻은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어식인 Kiev 대신 우크라이나어 이름에 따른 로마자 표기인 Kyiv를 보급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우크라이나 국내의 모든 공문서나 표지판에서 Kyiv를 쓰는 것은 물론 외국의 여러 국제 기구나 정부 기관, 일부 언론에서도 Kyiv를 채택했다. 하지만 영어권 일반인들은 압도적으로 Kiev라고 알고 있으며 영어권 주요 언론에서도 전통 표기인 Kiev를 계속 쓰는 곳이 많다. 그나마 이것은 영어권 이야기이고 한국에서는 '키예프' 대신 '키이우'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우크라이나의 여러 고유명사는 우크라이나어를 기준으로 적지만 키예프만은 러시아어식 관용 표기로 적는다. 참고로 키예프를 고대 동슬라브어로는 '크이예부(Кꙑѥвъ ‎Kyjevŭ)'라고 했다.

중세 역사서에 따르면 10세기 후반 키예프의 대공이 된 볼로디매루(고대 동슬라브어: Володимѣръ ‎Volodiměrŭ)는 슬라브인의 토속 신앙 대신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자들을 유럽 각지에 보내 여러 종교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음주를 금지하니 마음에 들지 않았고 유대교의 신은 자신이 선택한 민족이 나라를 빼앗기도록 허락한 힘없는 신으로 보였다. 로마 가톨릭교는 예식이 따분해 보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본 그리스 정교 예식은 볼로디매루가 보낸 사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래서 988년 볼로디매루는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고 이를 키예프 루스의 국교로 채택했다.

볼로디매루는 우크라이나어로 볼로디미르(Володимир Volodymyr), 러시아어로 블라디미르(Владимир Vladimir)로 알려져있다. 사실 그가 그리스 정교로 개종한 것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생각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이는 그 후 동슬라브인의 역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이 되었으며 후에 성인으로 떠받들여졌다. 오늘날 키예프의 중심부에는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이 있다. 1852년 모스크바의 관구장주교가 블라디미르/볼로디미르가 기독교로 개종한 9백주년을 기념하여 키예프에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제안해서 네오비잔틴 양식으로 1882년 건물을 완공하고 벽화까지 모두 완성이 된 1896년 축성식을 가졌다. 오늘날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키예프 총대주교청 소속이다.

키예프의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

이 글에서는 일부러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러시아·벨라루스가 나눠지기 이전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세 루스의 인명을 고대 동슬라브어 형태로 썼지만 보통은 류리크와 올레크, 블라디미르 등 러시아어 형태를 쓴다. 키예프 루스를 곧 고대 러시아로 보는 러시아의 사관을 그대로 답습한 탓도 있겠지만 소련 시절에는 우크라이나어와 벨라루스어가 따로 있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사어가 된 고대 동슬라브어는 말할 것도 없으니 비교적 잘 알려진 러시아어 형태를 쓰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키예프 루스의 인물들이 러시아 사람인지 우크라이나 사람인지 벨라루스 사람인지 묻는 것은 한국 고대사 인물들이 북한 사람인지 남한 사람인지 묻는 것처럼 말이 되지 않지만 언어 가운데 하나를 고르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이는 마치 영어 등 유럽 언어에서 중국의 역사 인명을 적을 때 광둥어, 민난어, 하카어 등이 아닌 표준 중국어 발음을 따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키예프 루스의 인명은 보통 러시아어 형태로 쓰되 우크라이나 또는 벨라루스 역사에 한정해서 언급할 때에는 각각의 경우에 맞게 우크라이나어 또는 벨라루스어 형태를 쓰는 것이 좋겠다.

키예프 대공국은 11세기말 이후 분열되어 쇠퇴하다가 1240년대 몽골군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인구가 십만이 넘던 당시로서는 대도시였던 키예프는 몽골군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그 후 키예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키예프는 독립을 선언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볼셰비키 군이 지원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흡수되었다. 1922년에 소련이 출범할 때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초대 구성국 가운데 하나였다. 소련은 말이 좋아 동등한 연방이지 사실은 모든 구성국들이 모스크바의 지배를 받았다.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에 맞서 볼셰비키 군이 지원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도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하르코프(러시아어: Харьков Khar'kov, 현행 외래어 표기법대로는 '하리코프'), 즉 오늘날의 하르키우(Харків Kharkiv)였다. 이것이 소련 출범 후에도 계속되다가 1934년에야 키예프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선언하였고 키예프는 다시 비로소 독립국의 수도가 되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는 곧바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기념하여 이름지어진 독립 광장으로 향했다. 2004년 여름에 방문한 이후 키예프의 독립 광장은 두 차례 혁명의 주 무대가 되었으니 어떻게 모습이 바뀌었는지 궁금했다.

'끝소리' 페이스북 페이지와 영어판 누리집 kkeutsori.com을 새로 개장했습니다.

앞으로 세계의 말과 글에 대한 이야기거리를 좀 더 다양하게 나눌 수 있도록 '끝소리'라는 이름으로 페이스북 페이지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또 다른 언어권 사람들도 읽을 있도록 영어판 누리집 kkeutsori.com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끝소리'에서는 블로그에 새로 글을 올리면 링크하는 것은 물론 블로그에 싣기에는 조금 짧은 글이나 링크도 가끔 남길 생각입니다. 또 소셜미디어인만큼 언어에 대한 다양한 내용으로 여러분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블로그 관리는 매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외국어의 한글 표기가 궁금하시면 페이스북 페이지로 연락하시는 것이 답장이 빠를 겁니다.

영어판 누리집은 이곳에 쓴 블로그 글의 영어판도 올리고 영어로 된 다른 자료들도 올릴 생각입니다. 특히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영어로 번역해서 올려놓았습니다(Loanword Transcription Rules 참조). 아마도 외래어 표기법을 전부 번역하여 영어로 소개하는 것은 사상 최초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kkeutsori.com에는 이미 최근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 가운데 일곱 개를 영어로 번역해서 올렸습니다.
앞으로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브라이드고래/브뤼데고래', '밍크고래/밍케고래' 표기 용례

수염고래아목에 속하는 고래 가운데 비교적 몸집이 작아 길이가 보통 15미터를 넘지 않고 영어로 Bryde's whale이라고 부르는 고래가 있다. 예전에는 한 종으로 쳤으나 실제로는 시탕고래(Sittang whale, Sittang은 미얀마의 시타웅 စစ်တောင်း Sittaung 강의 옛 영어 이름) 또는 이든고래(Eden's whale, 영국령 버마 주재 고등판무관 애슐리 이든 Ashley Eden의 이름을 땀)로 알려진 Balaenoptera edeni와 상대적으로 몸집이 크고 먼 바다에서 서식하는 Balaenoptera brydei가 다른 종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Balaenoptera brydei (Wikimedia: Morningdew, CC BY-SA 3.0)

이 고래는 위도 40도까지의 열대 및 온대 해양에 분포되어 있는데 한반도 근해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보리고래(영어명: sei whale, 학명: Balaenoptera borealis) 등 생김새가 비슷한 고래와 쉽게 헷갈리므로 한국어 고유 일반 명칭이 따로 없고 그냥 Bryde's whale을 번역해서 쓴다. 이 고래의 일반명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실려있지 않지만 생물학 관련 서적과 백과사전류에 실린 경우에는 모두 '브라이드고래' 또는 '부라이드고래'로 쓰고 있다(손호선·안두해·김두남 〈한반도 근해 고래류의 한국어 일반명에 대한 고찰〉). 즉 Bryde를 영어식으로 [ˈbɹaɪ̯d] '브라이드'라고 발음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표기한 것이다. '부라이드'라는 표기는 국어에서 양순음 'ㅂ', 'ㅍ', 'ㅁ' 뒤의 '으'와 '우'를 잘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나온 것인데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이런 경우의 삽입 모음은 '으'로 통일하니 '부-'보다는 '브-'로 써야 한다.

그런데 Bryde's whale에 관한 영어 자료를 찾으면 대부분 먼저 그 발음에 대해서 얘기한다. 실제로는 Bryde의 영어 발음이 철자에서 쉽게 연상되는 [ˈbɹaɪ̯d] '브라이드'가 아니라 [ˈbɹuːd.ə] '브루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발음을 틀리지 말라고 발음을 소개하는 것인데 영어 철자로는 발음을 제대로 표현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Bryde's를 'broodas', 'brooders', 'BROO-dus', 'broo-dess'로 쓰거나 Bryde를 'BREW-də'로 쓰는 등 제각각이지만 이들 모두가 나타내고자 하는 Bryde의 영어 발음은 [ˈbɹuːd.ə] '브루더'이다.

이처럼 특이한 발음이 쓰이는 것은 노르웨이의 포경업자 요한 브뤼데(Johan Bryde, 1858년~1925년)를 딴 이름이기 때문이다. 브뤼데는 영국령 나탈 식민지(오늘날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동부)에 현지 최초의 포경 기지를 세웠다. 노르웨이어 인명 Bryde는 [²bryːdə] '브뤼데'로 발음된다(발음 기호의 ²는 고저 악센트 가운데 제2성이란 것을 나타낸다). 영어에는 없는 노르웨이어 모음 /yː/ '위'는 영어에서 /iː/ '이' 또는 /uː/ '우' 가운데 하나로 흉내낼 수 있지만 Bryde에서는 후자가 쓰이게 되었다.

물론 영어에서 쓰는 Bryde의 발음은 노르웨이어를 영어식으로 불완전하게 흉내낸 것이기 때문에 한글 표기의 기준으로 삼기는 어색하다. 노르웨이어 이름으로 보고 외래어 표기법의 노르웨이어 표기 규정에 따르려면 Bryde [²bryːdə]는 '브뤼데'로 적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들은 '위'를 이중모음 /wi/ [ɥi]로 발음하지만 아직 표준 발음은 단모음 /y/를 기본 발음으로 삼고 이중모음으로 발음하는 것도 허용하는 것으로 치기 때문에 외국어의 /y/는 외래어 표기법에서 '위'로 적는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게르만어의 무강세 중설 중모음 [ə]는 영어와 네덜란드어를 제외하고는 철자 e에 해당하면 '에'로 통일해서 적는다. 그래서 영어 [ˈbɹuːd.ə]는 '브루더'이지만 노르웨이어 [²bryːdə]는 '브뤼데'이다.

다른 언어에서는 어떻게 부를까? 노르웨이어로는 Brydehval [²bryːdəvɑːl] '브뤼데발' 또는 Brydekval [²bryːdəkvɑːl] '브뤼데크발'이라고 한다. 노르웨이어 hval [ˈvɑːl, ²vɑːl] '발' 또는 kval [ˈkvɑːl, ²kvɑːl] '크발'은 '고래'를 뜻한다. 노르웨이어는 특이하게 보크몰(bokmål)과 뉘노르스크(nynorsk)라는 두 가지 표준이 있는데 보통 보크몰에서는 hval '발', 뉘노르스크에서는 kval '크발'이 선호되는 듯하지만 두 표준 모두 hval '발'과 kval '크발' 두 형태를 인정한다. 덴마크어 Brydeshval '브뤼데스발', 스웨덴어 Brydes fenval '브뤼데스 펜발' 등 같은 북게르만어군 언어에서도 물론 Bryde의 발음을 원어에 가깝게 한다.

독일어로는 Brydewal인데 독일어판 위키백과에서는 [ˈbryː.də.ˌvaːl] '브뤼데발'이라고 친절하게 발음 소개까지 한다.

로마자를 쓰는 대부분의 언어에서는 발음에 상관없이 Bryde라는 글자를 그대로 쓰지만 개중에는 발음에 따라 고유 명사의 철자도 바꾸어 쓰는 언어가 있다.

세계 고래류 데이터베이스(World Cetacea Database)에 따르면 리투아니아어에서는 Braido nykštukinis ruožuotis라고 부르는 반면 슬로베니아어에서는 Bridov kit라고 부른다. 즉 리투아니아어에서는 Bryde의 발음을 '브라이드'로 보았지만 슬로베니아어에서는 '브뤼ㄷ-'로 시작한다고 본 것이다(-ov는 격어미이다). 표준 슬로베니아어에는 /y/ '위' 음이 없기 때문에 이를 /i/ '이'로 흉내낸다. 예를 들어 '앞치마'를 뜻하는 šircl '시르츨'은 독일어의 Schürze '쉬르체'에서 온 차용어이다.

아예 다른 문자를 쓰는 언어들을 보면 러시아어에서는 полосатик брайда polosatik brayda, 우크라이나어에서는 Смугастик Брайда Smuhastyk Braida라고 부른다. 즉 Bryde의 발음을 '브라이드'로 본 것이다. 다만 여기서 예로 든 이들 이름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물음표 표시가 되어있다.

누구나 편집할 수 있는 다국어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에서 표제어로 쓰는 이름을 보면 아제르바이잔어에서는 Brayde zolaqlı balina라고 부르며 카자흐어에서는 Брайд киті Brayd kïti로 쓴다. 그런데 불가리아어로는 Ивичест кит на Брюде Ivichest kit na Bryude로 쓴다. 즉 Bryde의 노르웨이어 발음을 기준으로 '브류데'라고 흉내낸 것이다. 불가리아어에도 /y/ '위' 음이 없는데 이를 /ju/ '유'로 흉내낸다(자음 뒤에서는 /j/가 따로 서는 반모음이 아니라 앞의 자음을 연자음으로 만드는 것으로 실현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vik.tɔʁ y.ɡo])는 불가리아어로 Виктор Юго Viktor Yugo '빅토르 유고'라고 한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을 보면 슬로베니아어와 불가리아어에서는 Bryde의 발음을 제대로 알고 쓴데 비해 러시아어, 리투아니아어, 우크라이나어, 아제르바이잔어, 카자흐어 등에서는 모두 철자에서 잘못 짐작한 발음인 '브라이드'를 쓰고 있다. 재미있게도 '브라이드'로 쓰는 언어들은 모두 구소련에 속했던 나라에서 쓰이는 것으로 러시아어에서 쓴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어의 영향 때문에 러시아어 하나에서 틀리게 쓰면 다른 언어에서도 그대로 따라 써서 파급력이 큰 것이다.

물론 아무나 편집할 수 있는 위키백과의 성격상 각 언어의 표준 용법을 제대로 나타낸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Bryde의 영어 발음을 '브라이드'로 잘못 짐작하는 것은 한국어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한국어에서 '브라이드고래'로 쓰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이다.

원칙적으로는 '브뤼데고래'로 쓰는 것이 맞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다들 '브라이드고래'로 쓰고 있다면 굳이 고칠 필요가 있을지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인 가운데 '브라이드고래'에 대해서 들어본 이가 몇이나 될까?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낮은 '브라이드고래'가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널리 쓰이는 이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위에서 인용한 〈한반도 근해 고래류의 한국어 일반명에 대한 고찰〉을 보면 가장 큰 고래 종인 Balaenoptera musculus (영어명: blue whale)를 '대왕고래', '왕고래', '흰긴수염고래', '흰수염고래' 등으로 부르는 것에서 보듯이 잘 알려진 대형 고래의 한국어 일반명도 상당한 이견이 많은 상황이니 '브라이드고래'로 쓰던 것을 '브뤼데고래'로 바꾼다고 해서 생기는 혼란은 상대적으로 미미할 것이다.

현재 '브라이드고래'로 쓰는 것은 '브라이드'가 Bryde의 올바른 표기인줄로 알고 쓰는 것이지 Bryde의 원 발음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쓰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Bryde는 원래의 노르웨이어 발음에 따라 적으면 '브뤼데'이며 영어에서도 '브라이드'가 아니라 '브루더' 비슷하게 발음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사람들이 '브라이드고래'를 고집할지는 미지수이다. '브뤼데고래'는 일반인이 Bryde라는 철자에서 쉽게 연상시킬 수 없다는 단점이 있는 대신 '브라이드고래'보다는 한 글자가 더 적다는 장점이 있다. 고래의 일반명으로서 예전처럼 '브라이드고래'를 계속 쓸지, '브뤼데고래'로 고쳐 쓸지는 결국 전문가들 및 일반 언중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일단 문제 제기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여기서는 앞으로 '브뤼데고래'로 부르자고 과감히 주장해본다.

물론 더 널리 알려진 고래 이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국 동해안을 포함한 전세계 해양에 분포한 밍크고래가 대표적인 예이다. 밍크고래는 길이가 보통 10미터를 넘지 않아 브뤼데고래보다도 작다. 영어에서 minke whale이라고 부르는 고래는 Balaenoptera acutorostrata와 Balaenoptera bonaerensis 두 종인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가운데 동해안에서도 서식하는 북방 종인 Balaenoptera acutorostrata를 '쇠정어리고래'라고 부르며 '밍크고래'를 '쇠정어리고래'의 다른 이름으로 취급한다. '쇠정어리고래'는 일본어에서 쓰는 이름 가운데 하나인 小鰮鯨 (コイワシクジラ) koiwashi kujira를 번역한 것인데 최근에는 아무래도 영어 이름의 영향인지 대부분 '밍크고래'로 쓰는 추세이다. 일본어에서도 요즘에는 영어 이름을 따라 ミンククジラ minku kujira로 쓴다.

Balaenoptera acutorostrata (Wikimedia: NOAA United States, Public Domain)


그런데 영어에서 minke는 [ˈmɪŋk.i, -ə] '밍키/밍커'로, 즉 두 음절로 발음된다. 영어의 게르만어계 차용어에서 원어 발음이 [kə]인 -ke는 영어에서 [ki]가 되기도 하고 [kə]가 되기도 하는데 전자가 더 영어식이다(예: Bernanke [bəɹ.ˈnæŋk.i] '버냉키'). 그래서 minke도 영어에서 '밍커'보다는 '밍키'로 더 많이 발음되며 사전에 따라 '밍키'라는 발음 하나만 제시하기도 한다.

영어명 minke whale의 어원은 노르웨이어 minkehval '밍케발'을 번역한 것이라는 것 외에는 확실하지 않다. minkehval [²miŋkəvɑːl] '밍케발'과 minkekval [²miŋkəkvɑːl] '밍케크발'이 노르웨이어 단어가 맞기는 하지만(출처) 잘 쓰이지 않고 정작 노르웨이어에서 많이 쓰는 이름은 vågehval [²vɔːɡəvɑːl] '보게발' 또는 vågekval [²vɔːɡəkvɑːl] '보게크발'이다. 작은 만(灣)을 뜻하는 단어 våg [ˈvɔːɡ] '보그'에서 왔다.

영국의 작가 프랜시스 다운스 오머니(F. D. Ommanney [ˈɒm.ən.i])가 쓴 포경에 대한 고전 《잃어버린 리바이어던(Lost Leviathan, 1971년)》에는 Meincke라는 노르웨이 포경업자가 이 고래를 대왕고래로 잘못 알고 쐈기 때문에 노르웨이어에서 그의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즉 Minke는 Meincke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어쨌든 영어에서는 늦어도 1931년에 Minke Whale이란 이름이 문헌에 등장한다.

Meincke는 Meine라는 이름에 지소형 접사 -ke가 붙은 저지 독일어식 이름이다. 저지 독일어는 독일 북부에서 쓰이며 역사적으로 한자 동맹 시대에 노르웨이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각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런 역사도 있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우니 노르웨이 사람이 저지 독일어식 성을 쓴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한편 같은 이름이 프리지아어식으로는 Minke가 된다. 프리지아어는 네덜란드 북부 프리슬란트 주와 독일·덴마크 일부에서 쓰는 세 개의 언어(또는 방언)를 통틀어 이른다. 네덜란드에서는 Minke [ˈmɪŋkə] '밍커'라는 이름을 특히 여자 이름으로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진위를 알 수 없는 Meincke라는 노르웨이 포경업자 이야기 외에는 인명 Meincke/Minke와 고래 이름을 연관지을만한 고리를 찾기 힘들다. Meincke는 저지 독일어 이름으로 보면 '마인케'로 적는 것이 낫고 노르웨이어 이름으로 보면 '메인케'로 적는 것이 낫다.

또 노르웨이어 minkehval에서 온 것은 맞는데 minke는 사람 이름에서 온 것이 아니라 '더 작은(lesser)'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콜린스 영어 사전(Collins English Dictionary)》에 "probably from Norwegian minkehval, from minke lesser + hval whale (아마도 minke '더 작은' + hval '고래'에서 온 노르웨이어 minkehval에서)"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노르웨이어로 minke [²miŋkə] '밍케'는 '작아지다'라는 뜻의 동사 기본형(현재형 minker, 과거형·과거분사 minket, 현재분사 minkende, 명령형 mink)이고 형용사 '더 작은'은 mindre [ˈmindrə] '민드레'이다. 이를테면 고양이아과를 '더 작은 고양이류'를 뜻하는 mindre kattedyr '민드레 카테뒤르'로 부르고 표범아과를 '큰 고양이류'를 뜻하는 store kattedyr '스토레 카테뒤르'라고 부른다. '작아지다'라는 동사 기본형인 minke가 고래 이름으로 쓰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의미상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실제 밍크고래를 영어로 '더 작은 수염고래'라는 뜻으로 lesser rorqual [ˈlɛs.əɹ ˈɹɔːɹk.wəl] '레서 로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minke는 노르웨이어 발음에 따라 적으면 '밍케', 영어 발음에 따라 적으면 '밍키/밍커'이다. 노르웨이어가 원어이니 '밍케고래'로 적는 것이 나았을 것인데 Bryde를 '브라이드'로 옮긴 경우처럼 minke의 영어 발음을 철자만 보고 족제비와 비슷한 동물인 밍크(mink)와 동일한 한 음절 [ˈmɪŋk] '밍크'라고 잘못 알아서 이런 표기로 굳어진 것 같다. 〈한반도 근해 고래류의 한국어 일반명에 대한 고찰〉에 인용된 1962년 자료에는 '밍꾸'라는 표기로 나오는데 아마 일본어 ミンク minku를 일본어 발음에 따라 받아들인 결과가 아닌가 한다. 참고로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민쿠'이다. 그러니 애초에는 영어 발음이 [ˈmɪŋk] '밍크'라고 생각해서 일본어에서 ミンク minku라고 부른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일 수 있겠다.

이처럼 '밍크고래'는 minke의 노르웨이어 발음이나 영어 발음에 따른 표기와 다르지만 Bryde라는 인명에서 나온 Bryde's whale에 비해 어원이 불확실하며 동해안에서 혼획 내지 불법 포획되기도 하는 등 인지도가 높고 이미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수록되어 있으니 관용으로 굳어진 이름으로 취급하는 것이 좋겠다. 족제비와 비슷한 동물인 밍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동물인데 혼란을 줄 수 있다거나 한글 표기 때문에 영어 발음을 잘못 알 수 있다고 '밍크고래'라고 계속 쓰는데 반대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게 이름을 바꿀 충분한 사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서 어디까지 원칙을 따르고 어디까지 관용을 존중할지는 명확한 기준이 있을 수 없다. '브라이드고래'는 '브뤼데고래'로 고쳐 부르되 '밍크고래'는 '밍케고래'로 고칠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는 찬성하지 않는 이도 많을 것이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떤가?

고대 영어로 읽는 〈루돌프 사슴 코〉?!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 만일 네가 봤다면 불붙는다 하겠지"

빨갛게 빛나는 코 때문에 다른 사슴(정확히는 순록)들에게 놀림을 받다가 산타클로스의 부탁으로 성탄절 이브에 썰매를 이끌게 된 후 사랑을 받게 된다는 루돌프의 이야기는 1939년 미국의 로버트 메이(Robert L. May)가 쓴 책자에 처음 등장한다. 몽고메리 워드(Montgomery Ward)라는 시카고의 한 유통 업체에서 성탄절마다 판촉을 위해 책자를 무료로 배포하고는 했는데 돈을 절약하려고 외부 책자를 사들이는 대신 메이에게 써달라고 해서 Rudolph the Red-Nosed Reindeer (《빨간 코 순록 루돌프》)가 탄생한 것이다.

1949년에는 메이의 매부이자 작곡가로 이미 활동을 하고 있던 조니 마크스(Johnny Marks)가 루돌프 이야기를 소재를 노래를 지었고 이를 가수 진 오트리(Gene Autry)가 불러 첫 성탄절 시즌에만 175만 장 정도가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루돌프 사슴 코〉는 이를 번안한 곡으로 원래의 영어 제목은 책자 제목과 같이 "Rudolph the Red-Nosed Reindeer" (〈빨간 코 순록 루돌프〉)이다.

1890년~1900년경 러시아 아르한겔스크에서 순록이 이끄는 썰매를 타는 모습을 포토크롬(Photochrom) 인쇄술로 표현한 채색 사진(Wikimedia, Public Domain)

산타클로스의 썰매를 하늘을 나는 순록이 이끈다는 설정은 1821년에 나온 동시에 처음 등장했고 1823년에는 "A Visit from St. Nicholas" (〈성 니콜라우스의 방문〉)이라는 시에 순록 여덟 마리의 이름이 나온다. 이들은 대셔(Dasher), 댄서(Dancer), 프랜서(Prancer), 빅슨(Vixen), 코밋(Comet), 큐피드(Cupid), 던더(Dunder), 블릭섬(Blixem)이다. 네덜란드어로 '천둥'을 뜻하는 말에서 온 Dunder는 현대 네덜란드어 형태인 Donder나 독일어 형태인 Donner로 쓰기도 하고 네덜란드어로 '번개'를 뜻하는 말(현대 네덜란드어 철자는 Bliksem)에서 온 Blixem은 Blixen으로 쓰기도 하고 독일어 형태인 Blitzen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니 루돌프는 다른 순록들이 처음 나타난지 백 년도 더 지나고서 뒤늦게 산타클로스와 순록 전설에 합류한 것이다. 그러고도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순록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루돌프 이야기가 앵글로색슨어, 즉 고대 영어(대략 5세기~11세기)로 쓰여진 시에 나온다면? 일단 시를 고대 영어로 감상하자. Incipit로 시작하는 첫 줄은 라틴어로 되어 있다. 고대 영어에는 Ð/ð (eth)와 Þ/þ (thorn)라는 글자가 현대 영어에서 th로 나타내는 유성 치 마찰음 [ð]와 무성 치 마찰음 [θ]를 나타냈는데 어느 글자를 유성음에 쓰고 어느 글자를 무성음에 쓰는지는 별다른 규칙이 없었다.

Incipit gestis Rudolphi rangifer tarandus

Hwæt, Hrodulf readnosa hrandeor—
Næfde þæt nieten unsciende næsðyrlas!
Glitenode and gladode godlice nosgrisele.
Ða hofberendas mid huscwordum hine gehefigodon;
Nolden þa geneatas Hrodulf næftig
To gomene hraniscum geador ætsomne.
Þa in Cristesmæsseæfne stormigum clommum,
Halga Claus þæt gemunde to him maðelode:
"Neahfreond nihteage nosubeorhtende!
Min hroden hrædwæn gelæd ðu, Hrodulf!"
Ða gelufodon hira laddeor þa lyftflogan—
Wæs glædnes and gliwdream; hornede sum gegieddode
"Hwæt, Hrodulf readnosa hrandeor,
Brad springð þin blæd: breme eart þu!"

같이 소개되는 현대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Here begins the deeds of Rudolph, Tundra-Wanderer

Lo, Hrodulf the red-nosed reindeer—
That beast didn’t have unshiny nostrils!
The goodly nose-cartilage glittered and glowed.
The hoof-bearers taunted him with proud words;
The comrades wouldn’t allow wretched Hrodulf
To join the reindeer games.
Then, on Christmas Eve bound in storms
Santa Claus remembered that, spoke formally to him:
"Dear night-sighted friend, nose-bright one!
You, Hrodulf, shall lead my adorned rapid-wagon!"
Then the sky-flyers praised their lead-deer—
There was gladness and music; one of the horned ones sang
"Lo, Hrodulf the red-nosed reindeer,
Your fame spreads broadly, you are renowned!"


이를 비슷한 풍으로 한국어로 옮겨보았다.

툰드라의 방랑자 루돌푸스의 업적 이야기를 시작하노라

들으라, 빨간 코 순록 흐로둘프—
그 짐승은 콧구멍이 흐리지 않더라!
좋은 코 연골이 반짝이고 빛을 냈더라.
굽을 가진 자들이 그를 오만한 말로 조롱하며
그 동료들은 비참한 흐로둘프가
순록의 놀이에 같이하게 허락하지 않았더라.
후에 폭풍에 묶인 성탄절 전야에
성 클라우스가 이를 기억하고 그에게 가로되:
"밤눈이 밝은 친구여, 밝은 코를 가진 이여!
너 흐로둘프가 나의 날랜 수레를 이끄리라!"
그 후에 하늘을 나는 이들이 그들의 우두머리 사슴을 칭송하니
기쁨과 음악이 있더라; 뿔이 있는 이들 가운데 하나가 노래하더라
"들으라, 빨간 코 순록 흐로둘프,
네 명성은 널리 퍼지며 너는 유명한지라!"

물론 루돌프 이야기에 진짜 고대 영어 원전이 있는 것은 아니고 1996년에 미국의 필립 채프먼벨(Philip Chapman-Bell)이 루돌프 노래를 고대 영어로 쓴 패러디(Hrodulf Harndeor: An Old English Poem by Philip Chapman-Bell)이다. 여기에 보존된 그의 옛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어로 치면 루돌프 노래를 《용비어천가》 풍의 중세 국어로 쓴 셈이겠다.

고대 영어 문학은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영어권에서는 대표작인 영웅 서사시 《베오울프(Beowulf)》를 학교에서 배우는 일이 흔하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영어는 오늘날의 영어 화자들이 따로 공부하지 않고는 거의 해독이 불가능할만큼 현대 영어와 다르다. 4백 년 전의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영어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천 년 전의 고대 영어는 아예 외국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066년 노르망디 공이었던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프랑스어로는 Guillaume le Conquérant '정복왕 기욤')이 이끄는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후 잉글랜드가 노르만어(프랑스어와 가까운 노르만족의 언어)와 프랑스어를 쓰는 이들에게 지배를 받는 단절기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15세기에야 다시 영어가 프랑스어 대신 공문서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영어권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한 《베오울프》의 첫 문장은 아마도 고대 영어로 된 문장 가운데 가장 유명할 것이다.
Hwæt. We Gar-Dena in gear-dagum, þeod-cyninga, þrym gefrunon, hu ða æþelingas ellen fremedon.
Lo! We have heard of the glory of the kings of the people of the Spear-Danes in days of yore—how those princes did valorous deeds! (존 R. 클라크 홀(John R. Clark Hall) 번역)
들으라! 우리는 지난날에 창의 덴마크인들과 그들의 왕들의 큰 영예, 그 왕자(또는 귀족)들이 이룬 용맹스러운 업적에 대해 들어왔다.

대영 도서관 소장 《베오울프》 필사본 코튼 MS 비텔리우스 A XV (Cotton MS Vitellius A XV)의 첫 장. w 대신에 옛 글자인 Ƿ/ƿ (wynn)을 썼다(Wikimedia, Public Domain).

고대 영어의 hwæt는 현대 영어 what의 어원이며 원 뜻도 what처럼 '무엇'인데 전통적으로 《베오울프》의 첫 문장에서는 보통 듣는 이(원래 구전되는 시였다)의 이목을 끌기 위한 감탄사로 간주되어 현대 영어로 "Lo!" 외에도 "Hear me!", "Listen!" 등으로 번역되었다. 2000년 아일랜드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의 번역에서는 "So!"로 옮긴다. 이 hwæt가 어찌나 유명한 단어인지 위 패러디에서도 두 번이나 등장한다.

그런데 최근 케임브리지 대학의 조지 워크던(George Walkden) 교수는 고대 영어 문헌에 쓰이는 hwæt를 조사한 끝에 단독으로는 쓰이는 감탄사가 아니라 감탄문의 첫 단어로 쓰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The status of hwæt in Old English", 2011). 이 결론이 맞다면 지금까지 《베오울프》의 첫 문장은 오역되었던 것이다. "Lo! We have heard"가 아니라 "How we have heard"인 것이다. 감탄문이라는 것을 나타내려면 "아, 우리는 지난날에 창의 덴마크인들과 그들의 왕들의 큰 영예, 그 왕족들이 이룬 용맹스러운 업적에 대해 들어왔다!" 정도로 옮기면 된다. 어순을 무시하면 감탄사 "아" 대신 "~얼마나 들어왔는가!" 정도로 옮기면 좋을 것이다. 또 위 패러디에서도 해석은 "들으라, 빨간 코 순록 흐로둘프"보다 "아, 빨간 코 순록 흐로둘프"가 나을 것이다. 어순에 구애받지 않고 매끄럽게 옮기려면 "빨간 코 순록 흐로둘프 / 그 짐승은 콧구멍이 어찌나 흐리지 않던가" 정도일 텐데 Næfde '가지지 않았다'와 unsciende '반짝이지 않는'의 이중 부정 형태라서 이런 형태의 감탄문으로 바꾸기는 약간 무리이다.

고대 영어 시는 두운 반복과 묘사적 완곡어법을 즐겨 쓴다. 《베오울프》의 첫 문장에서 Gar-Dena와 gear-dagum, þeod-cyninga와 þrym에서 두운 반복을 볼 수 있다. 고대 영어 시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낱말을 연상시키는 낱말 두 개를 조합하여 돌려 표현하는 시적 완곡어법을 많이 썼는데 같은 게르만어 계통인 고대 노르드어(고대 아이슬란드어) 시에서 폭넓게 쓰이므로 이를 아이슬란드어 이름에 따라 '켄닝그(kenning)' 또는 영어식 발음에 따라 '케닝'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몸을 banhus (ban '뼈' + hus '집')라고 부른다던지 바다를 hronrad (hron '고래' + rad '길')라고 부르는 식이다. 덴마크인들을 '창의 덴마크인'이라는 뜻인 Gar-Dene (gar '창' + Dene '덴마크인', 속격은 Gar-Dena)로 표현하는 것도 비슷한 묘사적 어법이다.

루돌프(흐로둘프)에 관한 위의 시에서도 Hrodulf와 hrandeor, Næfde와 nieten, næsðyrlas 등에서 두운 반복을 볼 수 있다. 또 '순록'을 hofberend (굽을 가진 자), '썰매'를 hrædwæn (날랜 수레)으로 표현하는 등의 완곡어법을 통해 고대 영어 시를 능숙하게 패러디했다.

Rudolph는 게르만어계 이름으로 게르만 조어로는 *Hrōþiwulfaz로 복원할 수 있다. '명성'을 뜻하는 *hrōþiz와 '이리'를 뜻하는 *wulfaz가 결합한 것이다. 고대 영어에서는 이게 Hrōþwulf/Hrōðwulf 또는 Hrōþulf/Hrōðulf가 되었는데 위의 시에서는 Hrodulf로 쓴 것이 살짝 아쉽다. 영어에서는 이 이름이 별로 쓰이지 않았고 후에 독일어 Rudolf '루돌프', 네덜란드어 Roedolf '루돌프' 등 및 라틴어형 Rudolphus '루돌푸스' 등의 영향으로 다시 Rudolph로 소개된 것이다. 역사 인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Rudolf II, 1552년~1612년), 나치 독일의 정치가 루돌프 헤스(Rudolf Heß, 1894년~1987년) 등이 유명하며 뉴욕의 전 시장 루디 줄리아니(Rudy Giuliani)의 본명도 루돌프(Rudolph)이다.

게르만어계 이름에는 '이리'를 뜻하는 *wulfaz에 해당하는 요소가 흔히 등장하는데 《베오울프》의 주인공 이름인 Beowulf에서도 볼 수 있다. 정확한 어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첫 요소가 '벌'을 뜻하는 고대 영어의 beo라면 Beowulf는 '벌이리'를 뜻하는 것이 된다. 꿀을 좋아하는 곰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라틴어로 된 첫 문장에 나오는 Rangifer tarandus는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가 정한 순록의 학명이기도 한데 원문에서 Tundra-Wanderer '툰드라의 방랑자'로 번역했지만 근거는 없어 보인다. 스위스의 박물학자 콘라트 게스너(Conrad Gesner, 1516년~1565년)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대 라틴어에서 순록을 rangifer 또는 raingus라고 불렀는데 라프족, 즉 스칸디나비아 북부의 원주민 사미족은 reen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사미어에서 순록을 이르는 단어는 방언에 따라 puäʒʒ, boazu, boatsoj, båtsoj, bovtse 등이니(출처) 오히려 순록을 이르는 고대 노르드어 hreinn에서 유래한 중세 스칸디나비아어 형태를 사미어로 잘못 안 것일 수 있다. 고대 노르드어에서 갈라져 나온 스웨덴어에서는 순록을 ren이라고 한다. 고대 노르드어 hreinn은 아마도 '뿔', '머리'를 뜻하는 인도유럽조어 어근 *ḱer-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한편 tarandus는 테오프라스토스(Θεόφραστος Theóphrastos), 아리스토텔레스(Ἀριστοτέλης Aristotélēs) 등 고전 그리스 학자들이 언급한 고대 그리스어로 τάρανδος tárandos라고 부르는 동물에서 따왔다. 소만한 크기의 사슴으로 색을 바꿀 수 있다고 했는데 만약 순록을 이르는 것이 맞다면 철에 따라 털갈이를 하는 것이 와전된 것일 수 있다.

대영 도서관 소장 필사본 할리 MS 3244 (Harley MS 3244) ff 36r-71v의 동물우화집(bestiarum)에 나오는 parandrus는 tarandus와 같은 동물로 보인다(Wikimedia, Public Domain).

영어에서 순록을 reindeer '레인디어'라고 하는데 '고삐'를 뜻하는 영어 단어 rein '레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앞서 언급한 고대 노르드어 hreinn은 '짐승'을 뜻하는 dýr와 합쳐서 hreindýri로 쓰이기도 했다. 고대 노르드어에서 나온 또 다른 언어인 현대 아이슬란드어의 hreindýr '흐레인디르'는 여기서 유래했다. 오늘날에는 쓰지 않지만 예전에는 스웨덴어에서도 같은 원리로 rendjur '렌유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영어의 reindeer는 중세 영어에서 이와 비슷한 중세 스칸디나비아어 형태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대 영어에서부터 이미 위의 시에서 쓴 hrandeor를 쓴 것 같지는 않다.

원래 고대 영어의 deor는 그에 대응되는 고대 노르드어의 dýr처럼 사슴에 한정되지 않은 '짐승'을 뜻했다(그러니 위의 시에서 laddeor는 '우두머리 사슴'보다는 '우두머리 짐승'으로 쓰는 것이 사실 정확하다). 그러다가 중세를 거치면서 영어의 deer는 '사슴'으로 의미가 축소되었으니 영어에서 사슴과에 속하는 순록의 이름인 reindeer에 사슴을 뜻하는 deer가 들어가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이다. 순록을 이르는 독일어의 Rentier, 네덜란드어의 rendier도 영어처럼 중세 스칸디나비아어에서 따온 말인데 독일어의 Tier, 네덜란드어의 dier는 그냥 '짐승'을 뜻한다.

보너스로 〈루돌프 사슴 코〉 시조 버전:

루돌프 사슴 코는 빨갛게 빛이 나서
나머지 사슴들의 놀림거리 되었으나
산타의 썰매 이끈 후 명성 널리 떨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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